가볍게 한국의 옛 유교문화를 배우는 논산의 고정리 양천 허씨 정려를 소개드립니다.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일대에는 논산을 대표하는 성씨 중의 하나인 광산 김씨 일가의 유적과 조선 중기 이후 조선 시대의 사상을 주도한 유학자 사계 김장생의 종가와 사당 그리고 그 일가의 묘역들이 있습니다.
광산 김씨 가문을 명문가로 일으킨 여인 양천 허씨와 그를 기리는 정려(旌閭)가 이곳에 있어 광산 김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내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양천 허씨 정려각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高井里)에 있는 조선 전기에 세워진 정려각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9호입니다.
정려(旌閭)는 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이나 효자·열녀의 집 앞에 나라에서 세운 붉은 문을 가리키는데 이곳은 김장생의 7대 할머니이시며 광산 김씨를 일으킨 양천 허씨의 정려각입니다. 작게 보이지만 특이한 모습입니다.
양천 허씨의 손자 김국광의 사당과 종가
양천 허씨 정려를 지나 약 100여 미터를 올라 가면 허씨의 손자로 좌의정에 오른 김국광의 사당이 있습니다.
김철산의 아들 김국광 (1415~1480)대에 광산 김씨가 본격적으로 연산의 유력한 세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광산 김씨 가문이 조선의 3대 명문을 이루기 까지는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인 양천 허씨(陽川許氏) 의 사연과 공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로서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약채의 장남으로 한림원 벼슬을 하던 김문과 혼인을 하였지만 그가 일찍 사망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긴 허응 부부는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를 시키려고 혼처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 길로 개성을 떠나 유복자인 아들 철산을 데리고 김문의 아버지 김약채가 터를 잡아 살고 있는 연산 고정리의 시가까지 걸어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산길을 걸으면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지켜주었는데 연산 시댁에 무사히 도착하자 곧바로 사라졌다고 전합니다.
그 후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며 아들 철산을 사헌부 감찰로 훌륭히 키우고 일생을 마쳤는데 이런 사실이 조정에 전해지자 세조 13년(1467)에 명정(붉은 천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성명 등을 쓴 조기)을 받고, 정려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광산 김씨 가문에서 김국광, 김장생, 김집 등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연산면 고정리의 작은 시골길에 이렇게 많은 이정표가 한곳에 붙어 있어 각각의 지역을 가리키고 있는데 모두 광산 김씨 일가의 유적입니다. 광산 김씨 가문이 이 일대에서 크게 번성했음을 보여줍니다.
양천 허씨가 수절하면서 키운 김철산은 사헌부 감찰에 그쳤지만 그의 손자 김국광이 좌의정에 올랐고 그 후 김계휘, 김장생, 김집 등 조선시대 정치 사회의 주요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모두 양천 허씨의 정절과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능했다는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사계 김장생의 종가
율곡 이이의 수제자로 꼽히는 분이 사계 김장생 이며 양천 허씨의 7대 손자가 됩니다. 17-18세기 당시에는 김장생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할 만큼 당대 최고의 정치인들과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학자로 존경 받았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를 예학(禮學)으로 타개하고자 한 사람이 사계 김장생으로서 그가 살았던 시기를 전환점으로 조선 시대의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이 많이 달라진 것으로 역사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문화의 전통문화 양상은 17세기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상과 생활 정신을 이루는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사계 김장생 선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계 종가에 걸린 동행 찻집 간판
사계의 종가에 지금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14대 손이 집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 많이 있어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작은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오늘은 휴일이라서 차를 마시지는 못했지만 사계의 종손을 만나 자랑스러운 그의 조상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장생 선생 묘소 일원비와 양천 허씨 사실기
사계 종가의 뒤편에는 사계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그 뒤의 나지막한 언덕에 사계 일가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위에 모신 분이 사계 김장생이고 그 묘소 밑에 7대조 할머니이신 양천 허씨의 묘소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업고 있는 형상으로 묘소를 조성할 때 손자가 할머니 보다 위 자리에 위치하는 것에 대해 모두의 이견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묘소 일원에는 김장생을 비롯하여 광산 김씨의 중흥을 이룬 양천 허씨와 아들 김철산, 후손인 김겸광, 김공후, 김선생 등의 묘소가 있는 곳입니다. 선조들 보다 제일 높은 곳에 모셔진 이가 사계 김장생입니다. 그만큼 김장생의 후광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일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사계를 모신 사당과 멀리 보이는 영모재
김장생 예학의 특징은 열린 예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행할 수 있는 가례를 정립하고자 노력했으며 그러한 과정에 필요한 학문 연구와 토론을 평생 지속했다고 합니다.
조선에 있어서 예학의 발전은 영 호남 지역의 학자들이 서로 적극적인 학술적 교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심에 김장생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음을 학자들이 모두 인정한다고 합니다.
사계 김장생 종가의 입구
유교문화가 엄숙하고 경직된 분위기만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 '동행 찻집'이라는 현대식 안내판이 있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현대적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같습니다. 김장생의 열린 예학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농촌의 한적한 동네에서 차를 마시면서 김장생이 예학에 몰두했던 시대를 그려보며 김장생의 학문과 이상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양천 허씨의 사당을 모신 영모재
충청도 연산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선비의 고장입니다. 17세기 논산의 김장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호서 예학파는 조선 최초의 예학파로서 논산이 한국예학의 산실이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특히 한 여인의 헌신과 봉사로 명문가를 이룬 광산 김씨 일가의 효행과 가족 사랑의 실천을 보인 점은 현대적 효(孝)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벼가 익어가는 초가을 평화스러운 연산면 고정리 일대의 들판을 거닐며 조선 시대 당대의 사상을 이끌었던 사대부들의 사당과 종가를 돌아보며 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알아보고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사상을 좀 더 깊게 배운다면 현재의 우리 생활 방식이나 윤리관과 가치관이 어떻게 정립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천 허씨 정려를 둘러 싼 농촌 풍경
고정리 일대의 넓지 않은 곳에 펼쳐진 광산 김씨 일가의 삶의 흔적을 답사하면서 '동방 예의지국'이라 불렸던 한국 사람들의 정신적 바탕이 이곳에서 큰 뿌리가 형성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에 유익한 공부를 한 오늘 하루입니다. 막 익어 가기 시작하는 푸른 들판이 싱그럽게 다가와 뿌듯함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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