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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알기쉽게 정리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58회 심화 문제와 해설 정리 (1) + 암기법

정답>

'부산 동삼동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는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된 () 시대의 대표적 유물 중 하나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유적에서는 곡물 등을 가공하는 데 사용한 갈돌과 갈판도 출토되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빗살무늬 토기', '갈돌과 갈판'이라는 표현에서 주어진 '() 시대'는 신석기 시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뽑은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원시적 수공업).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와 특징 : 간석기

1.신석기- 전기: 이른민무늬토기(원시무문토기)

중기: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 기하문토기)

V자형, 회색 사토질토기

후기: U자형토기, 황해도 봉산지탑리에서 탄화된 조,,수수가 출토농경시작

2.신석기유적지- 서울암사동, 부산동삼동, 황해도지탑리

3.돌가래, 돌보습, 돌낫 농기구

4.가락바퀴(방주차), 뼈바늘(골침)직조문화

 

오답 해설>

주로 동굴이나 막집에서 거주한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명도전, 반량전 등의 (중국) 화폐가 유통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 동검을 만든 것 역시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한 것도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참고로 이때 철제 무기도 만들어 사용하였다(이로써 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만 사용).

정답>

위의 사료에 '좌장군은 ()의 패수 서쪽에 있는 군사를 쳤으나 이를 격파해서 나가지는 못했다. ······ 누선장군도 가서 합세하여 왕검성의 남쪽에 주둔했지만, 우거왕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좌장군''누선장군', '패수''우거왕' 등의 표현에서 주어진 자료는 한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최초로 맞서 싸운 기원전 109년의 상황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사료에는 '마침내 한 무제는 동쪽으로는 ()/를 정벌하고 현도군과 낙랑군을 설치했으며, 서쪽으로는 대완과 36국 등을 병합하여 흉노 좌우의 후원 세력을 꺾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한에 의해 고조선의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의 상황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왕 아래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을 두었다(대신, 박사 등의 관직도 설치).

고조선의 변천

1.강성기(BC3)- 부왕,준왕: 왕위세습제, 관료조직(중앙관직-,대부,대신,장군 / 지방관-도위), 연과대등하게 대립, 단 고대국가 X

2.위만조선(BC194~BC108) 사마천사기, 중계무역

한과 전쟁(1):위만-흉노 연결되는 것이 두려워 한무제가 위 만조선 공격

위만조선:BC2세기 준왕을 축출하고 왕위차지

준왕은 진국에 망명, 한왕이 됨

팽창정책:진번임둔복속,요동진출꾀함

반한자주정책

위만조선멸망:BC108왕검성(평양)이함락되면서 멸망

멸망:한의의해서X 내부O

결과: 한사군 설치

3.한사군(낙랑,임둔,진번,현도)

 

오답 해설>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연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매년 10).

신지, 읍차라 불린 지배자가 있었던 나라는 삼한이다.

도둑질한 자에게 12배로 배상하게 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와 고구려이다(112).

읍락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이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자네 들었는가? 백제의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셨다더군'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들었네. 우리 마립간께서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신다고 하네'라는 말이 나와 있다. 백제의 동성왕(재위 479-501, 24)과 신라의 소지마립간(재위 479-500, 21)493년에 맺은 혼인 동맹*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2차 나제 동맹이라고도 하며, 당시 백제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였다[말다(末多) 또는 마제(摩帝)라고도 부름].

백제와 신라가 혼인 동맹을 맺은 것은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475, 장수왕 63) 5세기 후반 들어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동성 5 신라 소지마립간과 결혼동맹탐라복속(498)
동성결혼탐라
 

오답 해설>

(신라의) 법흥왕이 금관가야를 병합한 것은 재위 19년인 532년의 일이다.

김유신(595~673)이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647(선덕 여왕 16) 정월의 일이다.

고구려의 영양왕이 온달(?~590)*을 보내 아단성을 공격한 것은 590(영양왕 원년)의 일이다.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대(재위 559-590, 25)과 영양왕 때(재위 590-618, 26)의 명장으로, 영양왕 원년인 590년에 영양왕에게 자청하여 신라 진흥왕에 의해 복속된 죽령(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에 있는 고개) 이북의 땅을 회복하겠다며 자청하여 출전하였다가 아단성(지금의 서울 아차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가 당으로 건너가 군사 동맹을 성사시킨 것은 648(진덕 여왕 2)의 일이다.

정답>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령하여 ()/를 공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때 사다함은 나이가 15~16세였는데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 () 사람들이 뜻하지 않은 병사들의 습격에 놀라 막아내지 못하였고, 대군이 승세를 타서 마침내 멸망시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신라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이 멸망시킨 나라는 '대가야'이다(562, 진흥왕 23).

대가야는 경북 고령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고령 지역이 연맹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과정을 조사하는 것은 탐구 활동으로 적절하다(후기 가야 연맹, 5세기 초부터 성장).

흥왕 67 가야정복, 룡사, 강유역확보(신주설치),
국사(거칠부),비열홀주설치(함흥,순수비), 품주설치
화랑제도화, 당항성확보 진흥대황한국비품화
 

오답 해설>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것은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인 6688월의 일이다. 이에 고구려는 9도호부 42100현으로.나눠지고, 당의 장수 설인귀(614~683)가 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22담로에 왕족이 파견된 것은 백제 무령왕 대(재위 501-523, 25)의 일이다.

중앙 관제가 36부로 정비된 국가는 발해이다. 발해 문왕 대(재위 737-793)의 일이다.

최고 지배자의 호칭이 이사금이었던 국가는 신라이다. 3대 유리이사금(재위 24-57)에서 16대 흘해이사금(재위 310-356)까지 사용되었다.*

*이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른 것이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3대 유리이사금에서 18대 실성이사금(재위 402-417)까지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정답>

맨왼쪽 말풍선에 '이곳은 높은 성벽과 치를 갖춘 백암성이야'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가운데 말풍선에는 '당의 황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라는 말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병력의 열세와 내부의 분열로 함락되었지만, 그 뒤에는 안시성이 버티고 있었어'라는 말이 나와 있다. '백암성''안시성', '당의 황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는 표현에서 주어진 말들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한 제1차 여·당 전쟁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645). 당시 고구려 서쪽의 주요 방위성으로 '요동성, 개모성, 백암성, 안시성 등이 있었다.

 

1.여수전쟁(598~612)

원인: (영양왕598)이 말갈군 데리고 영주(요서)지방 먼저공격

과정: 1(영양왕598)-수문제30만대군장마,전염 실패

2(영양612)-수양제113,우중문을지문덕(살수대첩)

3(613),4(612)-수양제 패 수멸망

 

2.여당전쟁(618~)

원인: 당건국(618),연개소문대당강경책(천리장성:부여성~비사성)

(팽창정책), 신라친당정책, -돌궐-거란족고구려

과정: 보장왕(645)때에 당태종침략안시성(양만춘)win

결과: 고구려 계속된 전쟁으로 쇄약, 나당결속 공고

 

연표에서는 보장왕(재위 642-668, 28)이 즉위한 642년에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사이인 '() 시기'에 해당한다.

정답>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으로 진입하여 항복해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 사람들을 보내 이를 쳐서 쫓아냈다. ······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직후의 일이다(660.9). 참고로 웅진도독으로 온 왕문도(?~660)는 부임 직후인 9월에 신라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29)에게 당 고종(재위 649-683, 3대 황제)의 칙서와 하사품을 전하다가 의례를 채 마무리짓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에는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려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과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살랐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나당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과 백제 부흥군 사이에 백강 전투가 벌어진 것은 6639월의 일이다(백제 부흥 운동). 참고로 백강은 지금의 금강 하구(또는 동진강 하구)로 추정하고 있다.

복신(?~663)과 도침(?~661)(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한 것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킨 660(태종 무열왕 7) 8월의 일이다(의자왕의 다섯째 아들인 부여풍이 일본에서 귀국한 것은 6619).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과 나당전쟁

멸망 부흥 식민관청 나당전쟁 소마매기
백제
660
,
수신
치상치
5도독부(웅진도독)
소부리주
소부리주마진적성매소성기벌포신라승리(당군이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이전)삼국통일
한계-1.영토축소(~)
2.외세개입
의의-1.첫통일,
2.당축출(자주성),
3.국가경제력향상

668

모잠
연무
연수
9도독부
(안동도호-설인귀)
신라
676
  계림도독부(문무왕)
 

오답 해설>

사찬 시득(?~?)이 기벌포*에서 당군[설인귀]을 격파한 것은 676(신라 문무왕 16) 11월의 일이다[기벌포 전투(해전)]. 이로써 신라는 당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하였고, 삼국을 실질적으로 통일하였다. 참고로 매소성** 전투는 그 전해인 6759월에 있었다.

*기벌포: 충남 서천군 장항읍 일대를 일컫던 명칭으로, 금강 하구에 해당한다. 사비성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이기도 하다.

**매소성: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에 있어 대전리산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한탄강 부근에 있는 천험의 요새로 매초성이라고도 한다.

의자왕이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함락시킨 것은 642(의자왕 2) 8월의 일이다.

계백(?~660)이 이끄는 군대가 황산벌에서 항전한 것은 6607월의 일이다.

안승(?~?)이 신라에 의해 보덕국왕으로 책봉된 것은 674(문무왕 14) 9월의 일이다.

 

정답>

'이것은 일본의 귀족들이 신라에서 들어온 물품을 매입하고자 그 수량과 가격을 기록하여 일본 정부에 제출한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통일을 이루고 95소경을 설치한 이후의 시기에 일본과 교역하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지방 행정 제도로) 95소경을 설치한 것은 신문왕 5년인 685년의 일이다.

조세 수취를 위해 촌락 문서를 작성한 것은 (통일) 신라 시대의 일이다. 지금의 충북 청주 부근인 서원경의 4개 촌을 대상으로 작성된 신라 촌락 문서는 노동력 동원과 세금 징수를 위해 작성되었다(3년마다 작성). 작성된 시기로는 755년설(경덕왕 14), 816년설(헌덕왕 8), 876년설(헌강왕 6) 등 여러 설이 있다.

답 해설>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한 시기는 고려 시대이다.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군 등에 수출한 나라는 변한이다(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경).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우경*을 처음으로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철제 농기구가 도입된 초기 철기 시대로 추정된다. 우경이 우리나라 사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신라 지증왕 3년인 502년의 일(즉 사료상의 우경 시작 기록,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서 농사를 지었다." 삼국사기). , 실질적으로는 그 이전부터 우경이 실시된 것이 이 시기(6세기)에 이르러 쟁기, 호미, 괭이 등 철제 농기구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확대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 우경(牛耕):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는 일

수도에 도시부(都市部)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시장을 관리한 시기는 백제의 사비 시대*이다(538~660). 22부의 중앙 관청 가운데, 외관 10부에 속한 관청으로, 상업과 교역, 시장 관계의 업무를 담당하였다(내관 12). 시부(市部)라고도 하였다.

*사비 시대: 백제의 제26대 왕인 성왕(재위 523-554)이 사비(지금의 충남 부여)로 천도한 538년부터 백제가 멸망한 660(의자왕 26, 31)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

'이것은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 공주의 묘지(墓誌)이다. 묘지의 내용 중 문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부른 표현을 통해 ()/가 대내적으로 황제국 체제를 표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최고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 교육).

 

발해사 연구

1. 698 대조영돈화건국 ~ 926 거란에 멸망

2. 발해에 관한 기록 : 제발해 조아동동

구당서(발해말갈전),신당서(발해전)
이승휴 제왕운기 최초 발해사 연구, 서사시로 구성
유득공 발해고 신라발해南北國주장,발해사만다룬최초사서
한치윤 해동역사 발해를 고,,,고려와같은 비중으로다룸
신채호 조선상고사 발해, 신라 양국시대론
정약용 아방강역고 발해사를 우리민족사로 다룸
안정복 동사강목 삼국사기를 읽고 北國이 발해임을 밝혀냄
이종휘 동사 단군-기자-삼한-후조선본기와 따로 <세가>편을 서술하여면서 발해세가를 기자-부여-가야세가와 더불어 입전시킴

3. 36(당관제모방,독자성 )

정당성(대내상)-6(()충인의()지예신),선조성,중대성

4. 주자감(국립대)

5.중정대(감찰기관)-통신(사정부),고려(어사대),(사헌부)

6.지방제도-51562

7.발해가 우리민족이 세운나라라는 증거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당과신라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국가로 인식

 

오답 해설>

기인 제도를 실시한 국가는 고려이다(920~930년대). 고려 태조 왕건이 호족 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였다.

정사암 회의를 개최한 국가는 백제이다(천정대와 호암사지에서 열림).

최고 행정 관서로 집사부를 둔 국가는 신라이다(651, 진덕 여왕 5). 왕의 명령을 집행하고 보고하며 중요한 기밀 사무를 맡았다. 참고로 집사부(와 창부)의 전신으로 조세를 관장하는 품주(稟主)가 설치된 것은 진흥왕 26년인 565년의 일이다(집사부 설치로 651년에 폐지).

광덕, 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고려이다(고려 광종).

정답>

'왕이 구원을 요청하자,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만 명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을 알고,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에 침입하였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에 가서 연희를 즐기느라 적병이 이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경주를 침범해 경애왕(재위 924-927, 55)을 살해하고 경순왕(재위 927-935, 56)을 세운 것은 92711월의 일이다.

경순왕 김부가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된 것은 고려 태조에게 투항한 직후인 935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김흠돌(?~681)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의 일이다.

(발해의) 장문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한 것은 발해 무왕 14년인 732년의 일이다.

궁예(?~918)가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 것은 재위 11년인 911년의 일이다(연호 수덕만세).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진성 여왕 3년인 889년의 일이다(사벌주는 지금의 경북 상주).

정답>

왼쪽 말풍선에 '여기는 범일대사가 창건한 굴산사가 있던 곳이야. 거대한 당간 지주*는 이 절의 규모와 위상을 잘 보여주지'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 '굴선사는 가지산문 개창 이후 선종 불교가 유행하던 이 시기에 창건되었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선종 불교가 유행하던 시기는 (통일) 신라 말이다. 참고로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있는 (강릉) 굴선사()는 신라 문성왕 9년인 847년에 범일 국사(810~889)에 의해 창건되었다. 위 자료에 나온 당간 지주(보물 제86) 외 부도(浮屠)(보물 제85), 강릉 굴산사지 석불좌상 등이 남아 있다.

*당간 지주: 당간(幢竿)이란 당(, 불화를 그린 기)을 달아두는 장대(당을 거는 깃발대)를 가리킨다. 또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지지대가 당간 지주(支柱)이다.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당간 기주에 당을 달아 두었다. 현재 당이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당간을 지탱하는 지주만이 남아 있다.

고운[해운] 최치원(857~?)이 진성 여왕에게 시무책(10여 조)을 올린 것은 진성 여왕 8년인 894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화랑도의 규범으로) 원광(555~638)이 세속 5계를 제시한 것은 (신라) 진평왕 23년인 601년의 일이다.

(진골 출신인) 김대문(?~?)이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등을 저술한 것은 7세기 말과 8세기 초의 일이다.

(신라 중대의 재상인) 김대성(700~774)이 불국사 조성을 주도한 것은 경덕왕 10년인 751년의 일이다.

(신라의 대국통) 자장(590~658)의 건의로 황룡사 구층 목탑이 건립된 것은 선덕 여왕 15년인 646년의 일이다(건의한 것은 선덕 여왕 12년인 643).

정답>

'#11. 궁궐 안/과거 급제자 명단을 보며 말한다'가 나와 있고, 왕이 '몇 해 전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지방에 각각 경학박사 1명과 의학박사 1명을 보냈는데, 결과가 어떠하오?'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신하가 '송승연, 전보인 등 박사들이 정성스레 가르쳐 성과가 있는 듯 하옵니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또 왕이 '12목을 설치하고, 지방민에게도 학문을 권장하는 과인의 뜻에 부합하여소. 고생한 송승연에게 국자박사를 제수하고, 전보인에게 공복과 쌀을 하사하시오'라는 명이 나와 있다. '경학박사', '의학박사'를 지방에 보냈다는 구절과 '12목을 설치'하였다는 표현을 통해 주어진 자료(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왕은 고려의 제6대 왕인 성종(재위 981-997)임을 알 수 있다[12목을 설치한 것은 성종 2(983),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한 것은 성종 6(987)].

최승로(927~989)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정비한 것은 성종 원년인 982년의 일이다.



 
 
 
 
문신월과법

 
 
 
 
평창
 
 
 
사제도
 
 
서원
 
 
 
원중보
 
 


 
 
 
직개편
 
 
교주의
 
 
앙관제
 
 
권농정책
 
노비환천법 방관파견
12
자감
 
 
 
 

오답 해설>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한 것은 광종 9년인 958년의 일이다.

관학 진흥을 위해 양현고를 설치한 것은 예종 14년인 1119년의 일이다.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고 유학 교육을 강화한 것은 공민왕 16년인 1367년의 일이다.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한 고려 태조 19년인 936년의 일이다.

정답>

위의 사료에 '왕이 명하였다. 도성 안의 백성들이 역질에 걸렸으니 구제도감을 설치하여 치료하고, 시신과 유골은 비바람에 드러나지 않게 매장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여기서 구제도감(구급도감)은 고려 시대에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응급 구조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이다. 주어진 자료에서처럼 고려 예종 4(1109) 5월 개경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고 시체가 거리에 방치되는 사태로 번지자 구제도감을 설치한 것을 들 수 있다. 예종 원년(1106)에 설치된 동·서 제위도감, 충목왕 4(1348)에 설치된 진제도감, 공민왕 3(1354)에 설치된 진제색도 이와 유사한 기관이다.

아래의 자료에 '중서성에서 아뢰었다. 지난해 관내 서도의 주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사창과 공해(公廨)의 곡식을 내어 경작을 원조하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는 의창을 열어 진휼하십시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흑창을 확대한 의창이 만들어진 것은 고려 성종 5년인 986년의 일이다. 주어진 자료는 고려 문종 4년인 1050(경인년)에 있었던 일이다[고려 문종(재위 1046-1083), 11].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가 운영된 것은 고려 시대의 일이다(963, 고려 광종 14).



 
 
 
광덕,준풍(연호)
과거제(쌍기,무과X)
귀법사-화엄종
비안검법 교장려
 
거제도
 
위보
 
 
신숙청
 
과외교
 
법사
 
 
복제정
 


 
 
 

오답 해설>

유랑민을 구휼하는 활인서(活人署)를 둔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다(1466, 조선 세조 12). 1414(태종 14)의 동·서 활인원을 통합하여 활인서로 고친 것이다[·서 활인원은 또 1392(태조 원년)의 동·서 대비원을 개칭한 것]. 참고로 활인서는 조선 고종 19년인 1882년에 폐지되었다.

[을파소(?~203)의 건의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진대법이 실시된 것은 194(고구려 고국천왕 16)의 일이다.

국산 약재와 치료법을 소개한 향약집성방이 편찬된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다(1433, 조선 세종 15).

기근에 대비하기 위해 구황촬요를 간행하여 보급한 것 역시 조선 시대의 일이다(1554, 조선 명종 9).

정답>

'병마사 박서는 김중온에게 성의 동서쪽을, 김경손에게는 성의 남쪽을 지키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의 대군이 남문에 이르자 김경손은 12명의 용맹한 군사와 여러 성의 별초를 거느리고 성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 우별초가 모두 땅에 엎드리고 응하지 않자 김경손은 그들을 성으로 돌려 보내고 12명의 군사와 함께 나아가 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박서', '김중온''김경손'이라는 인물과 주어진 사료의 내용으로 볼 때 몽골의 제1차 침입 시에 있었던 사실임을 알 수 있다(1231, 고려 고종 18).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이른바 '강화도 천도', 1232(고종 19)].

오답 해설>

김종서(1383~1453)를 보내 6진을 개척한 것은 조선 세종 대의 일이다(1434, 세종 16). 세종은 그 전해인 재위 15(1433)에는 최윤덕(1376~1445)을 보내 4군을 개척하게 하였는데, 4군과 6진 모두 완성하기까지 대략 10여 년이 걸렸다.

서희(942~998)를 보내 (거란의 적장) 소손녕(?~996)과 외교 담판을 벌인 것은 고려 성종 대의 일이다(993, 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입 시'). 외교 담판 결과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윤관(?~1111)의 건의로] 별무반을 조직한 것은 고려 숙종 대이고, (별무반으로 여진을 정벌한 후) 동북 9성을 축조한 것은 예종 대의 일이다[1104(숙종 9)/1107(예종 2)].

[최무선(1325~1395)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몇 해 전 주전도감을 설치하고 화폐를 유통시켜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편익을 꾀하였으나,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주현에 명령하여 주식점(酒食店)을 열고 백성들에게 화폐를 활용해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게 하여 그 이로움을 알게 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주전도감이 설치된 것은 고려 숙종 2년인 1097년의 일이다.

활구라고 불리는 은병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의 일이다.



 
보기(마군-무반--)
화폐-의천의 주전도감



 
 

오답 해설>

특산품으로 솔빈부의 말이 유명한 것은 발해이다.

송상이 전국 각지에 송방을 설치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장보고(?~846)]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을 전개된 것은 (통일) 신라 시대인 9세기 전반의 일이다[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이 설치된 것은 삼국 시대인 6세기 초의 일이다(509, 신라 지증왕 10).

정답>

시대가 '고려 후기', '건국 영웅의 일대기를 서술한 장편 서사시로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왕 탄생 이전의 역사, 출생과 건국, 유리왕의 즉위 과정과 저자 이규보의 감상이 적혀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가 가리키는 것은 이규보(1168~1241)의 동명왕편임을 알 수 있다(1193, 고려 명종 23).

동명왕편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이 반영되었다.

오답 해설>

남북국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영재 유득공(1748~1807)의 발해고이다(1784, 조선 정조 8).

사초,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편찬된 것은 조선 왕조 실록이다.*

*사초(史草)란 사관이 매일 기록한 자료를 가리키고, 시정기(時政記)란 조선 시대에 춘추관에서 각 관서들의 업무 기록을 종합하여 편찬한 일종의 국정 기록물이다. 또 시정기 편찬이 결정된 것은 세종 때의 일(1434, 세종 16)이므로, '시정기'라는 말이 나오면 고려 시대는 해당 사항이 없다. 다시 말해 고려 시대에도 사초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하였지만, 사초와 함께 시정기까지 참고하여 실록을 편찬한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 왕조 실록만 해당한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를 수록한 (대표적인) 것은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이다(1285, 충렬왕 11).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이다(1145, 인종 23). 삼국사기는 본기, 열전 등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정답>

'흙으로 빚은 푸른 보물'이라는 제목 아래 '이번 기획전에서는 고려 시대 귀족 문화를 보여주는 비색의 순청자와 음각한 부분에 백토나 흑토를 채워 화려하게 장식한 상감 청자가 전시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관람 바랍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중기의 순청자(11세기)와 상감 청자(12~13세기)에 대한 내용으로, 주어진 선지에서는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만이 그에 해당한다(13세기 제작). 국보 제68호로, 표면에 무늬를 새겨 파내고 다른 재질의 재료를 넣어 제작하였다.

오답 해설>

(통일) 신라 시대인 8세기에 제작된 도기 연유인화문 항아리이다. 대호(大壺)와 소호(小壺) 2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시된 것은 소호이다(도기 연유인화문 소호). '()' 자가 항아리를 가리키는 '병 호'의 뜻이다.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이다. 고려 시대 청동 정병의 전형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고려) 자기가 아니라 은입사 기술이 적용된 금속 공예품이다.

*정병(淨甁): 본래 깨끗한 물을 담는 수병[물병]으로 승려의 필수품인 18()의 하나이던 것이 차츰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 공양구(供養具)로서 그 용도의 폭이 넓어졌다.

조선 전기에 제작된 청화 백자로, 백자 청화 매죽문 항아리[]이다(15세기 제작).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제작된 분청사기로, 분청사기 상감 운용문 항아리[]이다(15세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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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왼쪽 그림에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는 국왕의 명에 '전하, 네 가지 이유로 불가하옵니다'는 장군의 대답이 나와 있다. 고려 말기인 1388(우왕 14) 5월에 있었던 이성계(1335~1408)의 위화도 회군 전에 고려 조정에서 있었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 그림에 '새 도읍이 정해졌으니 도감을 설치하고 심덕부 등을 판사로 임명하여 궁궐을 조성하게 하시오'라는 임금의 명에 '명을 받들겠습니다'는 신하의 대답이 나와 있다. 조선 건국 후인 1394(태조 3) 10월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한 것은 1393(태조 2)이고,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한 것은 1394년의 일이다.

조준 등의 건의로 과전법이 제정된 것은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의 일이다(1391.5).

오답 해설>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이 설치된 것은 조선 성종 9년인 1478년의 일이다.

국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 완성된 것은 성종 16년인 1485년의 일이다.

(전세를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차등 과세하는) 연분9등법을 시행하여 수취 체제를 정비한 것은 세종 26년인 1444년의 일이다.

음악 이론[궁중 음악] 등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이 간행된 것은 성종 24년인 1493년의 일이다.

정답>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이예'라는 제목 아래 생몰연도(1373~1445)와 경력(통신부사, 첨지중추원사, 동지중추원사'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울산의 아전 출신으로 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수십 차례 ()에 파견되어 외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조선과 () 사이에 세견선의 입항 규모를 정한 계해약조* 체결에 기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는 일본임을 알 수 있다.

*계해약조: 1443(세종 25)에 조선이 대마도주와 세견선 등 무역에 관해 맺은 조약. 1426(세종 8)에 있었던 삼[3]포의 개항을 비롯한 무역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정식으로 맺은 조약이다.

부산포, 제포, 염포의 삼포를 개항한 것은 조선 세종 8년인 1426년의 일이다. 사실은 부산포가 이때 열리고 염포(울산)와 제포(창원, 내이포)10년 뒤인 1436(세종 18)에 추가로 개방하였다.

오답 해설>

하정사, 성절사, (천추사) 등의 사신을 파견한 대상은 명이다(명으로 보내는 사신).

경성,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한 것은 여진족의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킬 목적에서였다. 태종 6년인 1406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광군을 조직한 것은 고려 정종 2(947)으로,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사절 왕래를 위해 (한성에) 북평관을 개설한 것은 조선 세종 대의 일이다(1438, 세종 20). 원래 야인관이라 부르던 것을 북평관으로 고쳤다.

 

정답>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오방의 풍토가 같지 아니하고 곡식을 심고 가꾸는 데 각기 적당한 방법이 있다고 하셨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에 여러 도의 감사에게 명하기를, 주현의 나이든 농부들을 방문하여 농사지은 경험을 아뢰게 하시고 또 신() 정초에게 그 까닭을 덧붙이게 하셨다. 중복된 것을 버리고, 요약한 것만 뽑아 한 편의 책으로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농사직설이 관찬(官撰)으로 간행된 것은 조선 세종 11년인 1429년의 일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의 사례를 제시한 삼강행실도가 편찬된 것은 세종 16년인 1434년의 일이다.

세종 *집현전(경연),훈민정음,활자제조,불교정책,6조직계제X
*토지,세제개혁(수등이척법 69), 의창, 노비지위
*형벌제도정리[금부삼복법], 역법개정(칠정산내외편)
*측우기,자격루,혼천의, 아악정리(박연)
*(46) (쓰시마정벌-이종무), 삼포개항
*농사직설, 의방유취,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고려사
팔도지리지, 육전등록, 효행록, 사시찬요,
한글용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오답 해설>

(조선의 현실에 맞게) 예학을 정리한 가례집람이 저술한 이는 서인의 영수이자 예학의 대가였던 사계 김장생(1548~1631)이다. 가례집람은 김장생 사후인 숙종 11(1685)에 간행되었다.

국가의 의례를 정비한 국조오례의가 완성된 것은 성종 5년인 1474년의 일이다.

아동용 윤리·역사 교재인 동몽선습이 간행된 것은 중종 38년인 1543년의 일이다(아동용 초급 교재). 소요당 박세무(1487~1554)가 저술하였다.

군주가 수양해야 할 덕목을 제시한 성학집요가 집필된 것은 선조 8년인 1575년의 일이다. 율곡 이이(1536~1584)가 저술하였다.

정답>

'이달의 책'이라는 제목 아래 '이 책(추안급국안)에는 조선 시대에 왕명으로 ()에서 중죄인을 추국한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조옥(詔獄)이라고도 불린 ()/는 강상죄·반역죄 등을 처결하였으며 판사·도사 등의 관직이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는 국왕 직속 사법 기구인 의정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의정부는 조옥(詔獄) 외에 금오(金吾), 왕부(王府)라고도 불렸다.

의금부는 국왕 직속의 특별 사법 기구였다.

 

오답 해설>

사림의 건의로 중종 때 폐지된 기구는 소격서이다(1518, 중종 13). 소격서는 도교 의식을 주관하던 기구였다.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사로 불린 기구는 홍문관이다(1478, 성종 9).

5품 이하의 관원에 대한 서경권을 행사한 기구는 사헌부와 사간원이다.

서얼 출신의 학자들이 검서관으로 기용된 기구는 규장각이다(1776, 정조 즉위년).

정답>

'전시된 그림(북일영도)은 이 부대의 분영인 북일영*과 활터의 풍경을 묘사한 김홍도의 작품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임진왜란 중 류성룡의 건의로 편성된 이 부대는 직업 군인의 성격을 띈 상비군이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친 '이 부대'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선조 26) 8월에 설치된 훈련도감임을 알 수 있다.

*북일영: 훈련도감 소속의 궁궐 호위 부대 중 하나로, 경희궁 북문인 무덕문 밖 지금의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하였다.

훈련도감은 포수, 살수, 사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오답 해설>

용호군과 함께 2군으로 불린 부대는 응양군이다(고려 시대의 중앙군인 26).

진도에서 용장성을 쌓고 항전한 부대는 삼별초이다(진도 삼별초, 1270.6~1271.5).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되었다. 참고로 제주도로 건너가 다시 항전한 이른바 '제주도 삼별초'의 항전 기간은 12715월에서 12736월까지이다.

국경 지역인 북계와 동계에 배치된 부대는 주진군(고려 시대 양계의 상비군)이다. 주진군은 좌군, 우군, 초군으로 구성되었다.

국왕의 친위 부대로 수원 화성에 외영을 둔 부대는 장용영이다(1793, 정조 17).

정답>

()'왕에게 이괄 부자가 역적의 우두머리라고 고해바친 자가 있었다. 하지만 왕은, 반역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이괄의 아들인 이전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괄은 군영에 있던 장수들을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괄(1587~1624)이 난이 일어난 것은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1624.1).

()에는 '최명길을 보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왕이 수구문(水構門)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기에 도보로 따르는 신하도 있었고 성안 백성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을 지나 왕의 가마가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청의 침입으로 조선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것은 1636(인조 14) 12월의 일이다(병자호란).

정봉수(1572~1645)(평안북도의 염주군과 피현군의 경계에 위치한) 용골산성에서 항전한 것은 1627(인조 5) 2월의 일이다(정묘호란).

오답 해설>

이순신(1545~1598)이 명량에 대승을 거둔 것은 1597(선조 30) 9월의 일이다(명량 대첩).

권율(1537~1599)이 행주산성에서 적군을 격퇴한 것은 1593(선조 26) 2월의 일이다(행주 대첩).

서인 세력이 폐모살제를 이유로 반정을 일으킨 것은 1623(광해군 15) 4월의 일이다(인조반정).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발생한 것은 1589(선조 22) 10월의 일이다. 1591년까지 정여립과 연루된 다수의 동인이 희생되었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오늘 알아볼 지도(입연정도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이 지도는 의주에서 연경에 이르는 경로를 표시한 것입니다. 조선 사신들은 이 경로를 따라 ()/를 왕래하였는데, 이 사행에 참여한 만상은 국제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기도 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연경'이라는 지명(청의 수도, 지금의 중국 베이징), '조선 사신들', '만상'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주어진 '()'는 청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입연정도도(入燕程途圖: 조선 정조 시기인 18세기 말에 제작[채색 사본, 서울대 규장각 소장]

조선과 청은 조선 숙종 38년인 1712년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정하였다.

오답 해설>

박위(?~1398)를 파견하여 (왜구의) 근거지(쓰시마섬)를 토벌한 것은 고려 창왕 원년인 1389년의 일이다. 조선 시대에 이종무(1360~1425)가 세종 원년인 1419년에 쓰시마섬을 다시 토벌한 적이 있다.

한성에 동평관을 두어 (일본과의) 무역을 허용한 것은 조선 태종 7년인 1407년의 일이다. 즉 동평관은 일본 사신이 머물던 숙소로, 왜관(倭館)이라고도 하였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이 차지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영토를 되찾은 것은 고려 공민왕 5년인 1356년의 일이다.

포로 송환을 위하여 유정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파견한 것은 조선 선조 37년인 1604년의 일이다.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은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를 만나 강화를 맺고 이듬해에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참고로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자 1607(선조 40) 정사(正使) 여우길 일행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파견된 적이 있다(이후에도 통신사로 명칭이 바뀌기 전에 두 차례 더 파견).

정답>

'이것은 정민교의 서사시 군정탄(軍丁歎)입니다. 이 작품에 표현된 황구첨정 등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이 왕은 균역청을 설치하고 양역 제도를 개선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서사시 군정탄의 내용으로 '남편은 세상을 떳으나/뱃속에 아기가 있었지요. ··· 포대기로 싼 갓난아기/장정으로 군적에 올려/문이 닳도록 찾아와/군포를 바치라고 독촉하니'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왕은 균역법을 시행한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재위 1724-1776)임을 알 수 있다(1750, 영조 25).

속대전을 편찬하여 통치 제도를 정비한 것은 영조 22년인 1746년의 일이다.


3
대유폐

 


 


 



권농

비공감법

 


 
X
 
 
 

오답 해설>

수도 방위를 위하여 금위영을 창설한 왕은 숙종(재위 1674-1720, 19)이다(1682, 숙종 8). 이로써 5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

삼군부를 부활시켜 군국 기무를 전담하게 한 왕은 고종(재위 1863-1907, 26)이다(1865, 고종 2).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젊은 문신들을 재교육한 왕은 정조(재위 1776-1800, 22)이다(1781, 정조 5).

전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을 제정한 왕은 인조(1623-1649, 16)이다(1635, 인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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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퀴즈''조선 시대 직역(職役)을 맞히는 문제, 이제 마지막 힌트가 공개됩니다'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1단계 힌트로, '단안(壇案)이라는 명부에 등록되었다', 2단계 힌트로, '연조귀감에 연혁이 수록되었다', 3단계 힌트로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가 차례로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이와 관련된 직역은 향리(鄕吏)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연조귀감은 향리에 관계된 기록 및 그들 중 뛰어난 인물의 전기이다(1848, 헌종 14).

향리는 이방, 호방 등 6방에 소속되었다.

오답 해설>

상피제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일정반 범위 내의 친족 간에는 동일 관사나 통속관계(統屬關係)에 있는 관사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혹은 청송관(聽訟官시관(試官) 등이 될 수 없도록 한 제도이다. 어떤 지방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관리가 그 지방에 파견되지 못하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따라서 특정 지방에만 소속되어 계속 근무하는 향리와는 관련이 없다.

잡과를 통해 선발된 것은 기술관들이다(기술직 중인).

감사 또는 방백이라 불린 것은 (조선 시대 최고의 지방 장관인) 관찰사이다. 대개 종2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임명되었으며, 각 도에 파견되어 지방 통치의 책임을 맡았다. 관내 군현의 수령을 감독하고 근무 성정을 평가하였다.

공음전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은 것은 5품 이상의 (고위)관리들이다(고려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