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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알기쉽게 정리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58회 심화 문제와 해설 정리 (2)

정답>

'해미순교성지, 국제 성지로 지정'이라는 제목 아래 '해미순교성지가 전 세계에 30여 곳밖에 없는 국제 성지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병인박해 당시 () 신자들이 죽임을 당한 이곳은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지역이다. 이번 지정을 계기로 남연군 묘 등 여러 역사 유적이 있는 내포 문화권은 더욱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는 천주교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해미순교성지는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한 천주교 순교 성지로, 202131일 로마 교황청에 의해 국내 두 번째 국제 성지*로 선포되었다. 병인박해(1866) 이후 1872년까지 약 1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이다.

*천주교의 첫 번째 국제 성지는, '천주교 서울 순례길'이다. 20189월 아시아 최초로 로마 교황청이 공식 승인한 국제 순례지가 되었다. 서울 명동 성당, 가회동 성당, 서소문 순교 성지 등 순례지 24곳을 중심으로 인근 관광 명소가 연계되어 총 44.1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 '말씀의 길(명동 대성당~가회동 성당 9개소, 8.7)', 2코스 '생명의 길(가회동 성당~중림동 약현 성당 9개소, 5.9)', 3코스 '일치의 길(중림동 약현 성당~삼성산 성지 8개소, 29.5)'로 나뉜다.

천주교는 처음에 청을 다녀온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 천주교박해(17학문,18종교)

1.최초전래자(이수광-지봉유설) 최초세례자(이승훈)

최초순교자(윤지충) 최초한국신부(김대건) 최초서양신부(모방)

최초중국신부(주문모) 최초외국순교자(주문모)

2.박해

추조적발사건(명례방사건,정조1785)반회사건(정조1787)

천주교박해-신신기병 진황오척프

3
사옥
해박해 정조1791 산사건윤지충(최초순교자)
유박해 순조1801 벽파가시파남인계탄압 사영백서사건
해박해 헌종1839 가작통법, 사윤음
인박해 고종1866 랑스9Kill,최대박해,병인양요원인
 

오답 해설>

미륵불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예언한 것은 미륵 신앙이다. 일종의 예언 사상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하였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삼은 종교는 동학이다. 동경대전은 동학의 경전으로 1880(고종 17), 용담유사는 동학의 포교가사집으로 1881(고종 18)에 간행되었다. 동학은 후에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1861~1922)에 의해 천도교로 명칭을 바꾸었다(1905).

박중빈(1891~1943)을 중심으로 새생활 운동(과 간척 사업)을 펼친 종교는 원불교이다(1916.4).

단군 숭배 사상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종교는 대종교이다. 대종교는 홍암 나철(1863~1916)19091월에 창시한 민족 고유의 종교이다. 처음에는 명칭이 단군교였다가 이듬해인 19107월 대종교로 개명하였다.

정답>

'답사 보고서'라는 제목 아래 주제로 '대학자 ()의 흔적을 찾아서'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답사 지역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가 나와 있고, 소개로 '흠흠신서, 마과회통 등을 저술한 ()/는 정치·경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경로로는 '여유당'(생가), '문도사'(사당), '묘소'가 사진으로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주어진 자료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로, '마현 다산마을'라고 한다.

정약용은 (유배 중이었던 전남 강진에서 저술한) 경세유표에서 국가 제도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였다(1817, 순조 17).

  중농학파(유이정)   중상학파(유홍박박)
유형원 유반균 [반계수록][균전제]
병농일치()사농일치(교육)
한계:적서차별,내적서차별
문음제도,노비제도인정
유수원 [우서]-중국과비교
농업의전문화와 상업화로 농업생산력증대
대상인의 지역사회개발참여
이익 이익따지는-차가워-화폐X
[성호사설][한전제] 6좀론:노비,과거,양반,기교,승려,게으름[붕당론]화폐폐단지적
홍대용 임하룡의 신지군
[임하경륜][의산문답]
균전제주장,신분제철폐
주자학극복-부국강병요체
김석문지전설(의산문답)이익,정약용,김석문,홍대용
정약용 [여유당전서]-500
3부작
-목민심서(지방관의도리)
-경세유포(중앙정치,정전제)
-흠흠신서(형옥관리)
3논설
-탕론(왕교체가능설)
-원목(정치근본,목민관)
-전론(여전제,공동)
*정치개혁론-향촌단위방위
*기예론-북학파와같은주장
박지원 박지원 한화 선수
[열하일기]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한전론]
화폐유통,수레-선박이용,
양반문벌제도모순지적
박제가 제가 소비
[북학의]-4,
규장각검서관,청과통상강화,
수레-배이용 늘릴 것
절약보단 소비(우물)
박세당 [색경]-농가집성비판
윤휴와함께[사변록]지어성리학비판사문난적으로몰림
   
홍만선 [산림경제]    
서유구 [임원경제지][종저보]
 

오답 해설>

성호사설에서 한전론을 주장한 인물은 (성호) 이익(1681~1763)이다.

양반전에서 양반의 허례와 뮤능을 지적한 인물은 연암 박지원(1737~1805)이다.

의산문답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한 인물은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1766, 영조 42).

북학의에서 절약보다 적절한 소비를 권장한 인물은 초정 박제가(1750~1805)이다(1778, 정조 2).

정답>

'서원 철폐 관련 매주 시설 첫 발견'이라는 제목 아래 '창녕의 관산 서원 터에서 매주(埋主) 시설이 발견되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시설은 서원에 모셔져 있던 신주를 옹기에 넣고 기와로 둘러싼 뒤 묻은 것입니다. 이번 발굴로 만동묘 철거 이후 서원을 철폐하던 시기에 신주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만동묘가 철거된 것은 조선 고종 2년인 18655월의 일이고,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훼철]한 것은 고종 8년인 1871년의 일이다(600여 곳 철폐). 두 사건 모두 흥선 대원군의 집권기(1863.12~1873.11)에 일어났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군이 침입한 것은 18715월의 일이다(신미양요, 1871.5~7).

오답 해설>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가 동원된 것은 두 차례로 조선 효종 5년인 1654(변급), 효종 9년인 1658(신류)의 일이다.

(환재) 박규수(1807~1876)의 건의로 삼정이정청이 설치된 것은 철종 13년인 1862년의 일이다(1862.5).

지역 차별에 반발하여 홍경래(1771~1812)(평안도 일대에서) 봉기한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의 일이다(1811.12~1812.4).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하는 신해통공이 단행된 것은 정조 15년인 1791년의 일이다. 신해통공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

정답>

'1894, 녹두꽃 피고 지다'는 제목 아래 '낡은 체제와 외세의 압박에 맞섰던 농민들, 그들이 이끈 변혁의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해 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에는 에피소드로 '1부 고부 민란이 일어나다', '2부 전주성을 점령하다', '3()', '4부 우금치에서 패배하다'가 차례대로 제시되어 있다.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은 1894427일이고(같은 해 58일 전주 화약을 맺고 철수), 동학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배한 것은 같은 해 11월의 일이다(11.9~11.12).

남북접이 (3차 봉기를 위해) 충남 논산에 집결한 것은 1894(고종 31) 10월의 일이다(1894.10.9, 이후 충남 공주로 진군).

 

* 동학농민운동과 폐정개혁안

1.사건의 전개 : 삼복보 고백 황장집 갑공

삼례집회 김제 1892 1차교조신원운동
복합상소 한성 1893 2
보은집회 3차 정치적 색채, 제폭구민, 척왜양창의
고부민란 1


1 창의문, 사발통문, 조병갑 남접
-정치적
반봉건
사회개혁운동
백산 백산무장봉기(94)-무장조직화
황토현전투 2 절정기 vs지방군
장성싸움 vs 경군(홍계훈)
집강소 3 전주화약(자치정부)
갑오개혁, 청일전쟁(7, 텐진조약에의해서)
공주우금치
전투
2
봉기
4 항일구국운동,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남접(정치)+북접(종교)/ 대패

2. 12조 폐정개혁안

-토지는 평균분작, 공사채 물론 기왕의 것은 무효

-갑오개혁때 반영된 것

노비문서소각평량갓청상과부개가허용인재등용

무명,잡세 일체폐지

 

3.동학(1860,최제우최시형)[동경대전-한자][용담유사-한글]

철학(주기론),종교(샤머니즘,도교),사상(인내천),天人合一

외세배척, 양반사회부정

 

오답 해설>

(동학 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전라도 감영군에게) 승리한 것은 189447(음력)의 일이다(1984.4.6~4.7).

(동학 농민군이) 백산에 모여 4대 강령을 선포한 것은 1894326일의 일이다(1894.3.25~3.26).

(해월) 최시형(1827~1898)이 동학의 2대 교주가 된 것은 1863(철종 14) 초의 일로 추정하고 있다.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삼례 집회가 열린 것은 1892(고종 29) 11월의 일이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전화 설비 가설 및 운용권을 가진 한성 전기 회사가 설립되더니 새로운 직업이 생기는군'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새로운 문물이 계속 들어오니 앞으로 더 많은 변화가 나타나겠군'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주어진 자료 속 <모집 공고>에는 '전화를 연결해주는 교환수를 모집합니다'는 구절과 함께 지원 자격으로 '목소리가 분명하고 신체가 튼튼한 자''광무 6'이라는 표현이 나와 있다(광무 6년은 1902). 한성 전기 회사가 설립된 것은 광무 2년이자 고종 35년인 18981월의 일이다.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이 개통된 것은 19055월의 일이다(완공된 것은 190412).

오답 해설>

알렌(1858~1932)의 건의로 광혜원이 세워진 것은 고종 22년인 18852월의 일이다(3월에 제중원으로 개명).

박문국에서 한성순보가 발행된 것은 고종 20년인 188310월의 일이다.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이 설립된 것 역시 고종 20년인 18833월의 일이다.

우편 사무를 관장하는 우정총국이 처음 설치된 고종 21년인 18843월의 일이다. 같은 해 12월에 열린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폐지되었다.

정답>

'박승환은 병대(兵隊)에 대한 해산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국가가 망하였는데도 일본인 하나를 죽이지 못하였으니 죽어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차마 제군들이 병대를 떠나도록 놓아둘 수 없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겠다라고 하면서 결국 자결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대한 제국 군대의 해산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1907724일에 강요된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의 부수 비밀 각서에 의해 같은 해 81일 대한 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당시 시위대 제1대대장이었던 박승환(1869~1907)이 그에 항거하여 자결하였다.

오답 해설>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한 것은 19119월의 일이다(넓게 보면 1910.12~1913.7).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치(1852~1919)가 부임한 것은 191010월의 일이다(1910.10.1).

(사법권과 감옥 사무의 처리권을 박탈하는) 기유각서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인된 것은 19097월의 일이다(1909.7.12).

일진회가 한일 합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190912월의 일이다(1909.12.4).

 

정답>

'고종 32(1895) 1116'이라는 날짜가 제시되어 있고, '고종실록에 189512월의 기록이 없어. 18951116일 다음 날이 189611일이야. 어떻게 된 거지?'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건 당시 추진된 이 개혁으로 태양력이 도입되었기 때문이야'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개혁'은 을미개혁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895.8~1896.2).

건양이라는 연호가 제정된 것 역시 을미개혁 때의 일이다.

오답 해설>

지계아문이 설립된 것은 광무개혁 때의 일이다(1901.10~1904.4).

대한국 국제가 반포된 것 역시 광무개혁 때의 일이다(1899.8).

(자주적인 내정 개혁을 위한) 개혁 추진 기구로 교정청이 설치된 것은 1894(고종 31) 6월의 일이다(1894.6.11~25). 하지만 교정청은 일제의 강요로 같은 해 625일에 군국기무처가 설치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군제를 개편하여 5군영을 2(무위영과 장어영)으로 통합한 것은 고종 18년인 188111월의 일이다.

정답>

'우리 가족의 역사'라는 제목 아래 '옆 사진은 우리 할머니의 젊을 때 모습이에요. 할머니는 19살 때 사진만 보고 할아버지랑 결혼하기로 한 뒤 당시 포와(布哇)라고 불리던 이곳으로 가셨대요'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할아버지는 이미 1903년에 갤릭호를 타고 이곳으로 가셔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계셨어요. 두 분은 고된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해 호놀룰루에 터전을 잡으셨고 지금도 많은 친척이 살고 있어요'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밑줄 그은 '이곳'은 미국의 하와이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포와'는 하와이의 음역어이다.

하와이에서는 박용만(1881~1928)의 주도로 19146월 대조선 국민 군단이 조직되어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오답 해설>

대종교 계열의 중광단이 결성된 곳은 북간도(동만주)이다(1911.3). 1919년에 이르러 대한 군정회, 대한 군정부로 개편하다가 같은 해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승인을 받아 대한 군정서(북로 군정서)가 되었다.

권업회가 조직되어 권업신문을 창간한 곳은 러시아의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이다(1911.12/1912.4).

사회주의 계열의 한인 사회당이 조직된 곳은 러시아의 연해주(하바롭스크)이다(1918.4). 대한 제국 무관 출신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성재 이동휘(1873~1935)가 참여하였다(발기인 십여 명).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 학교가 설립된 곳은 서간도(남만주)이다(19116월경 설립된 신흥 강습소에서 19195월에 이르러 신흥 무관 학교로 개명).

정답>

'아무리 그럴듯하게 내세워도 이러한 통치 방식은 결국 우리 조선인을 기만하는 거야'라는 말과 함께 신문 기사에 '총독의 임용 범위를 확장하고, 지방 자치 제도를 실시한다. ······ 이로써 관민이 서로 협력 일치하여 조선에서 문화적 정치의 기초를 확립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9193월에 일어난 3·1 운동으로 말미암아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한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일제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를 표방한 배경은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된 탓이다.

  정치 경제 기타
1
9
1
0
무단정치
(헌병경찰통치)
-즉결처분권
-제복&
토지조사사업
(1912~1918)
토지조사령(1912)
회사령(허가제)
-민족기업성장억제
(1910)
민족탄압
산림령(11)
어업령(11)
광업령(15)
임야조사령
(1918)
1
9
2
0
문화정치
(보통경찰통치)
치안유지법(25)
:공산주의자체포
공포 but민족탄압
산미증식계획
(1920~1934)
회사령철폐(신고제)
-독점자본진출용이
조선농회령(1926)
[조선농회]:지주중심
관세철폐(23)
중공업투자
신은행령(27)
1
9
3
0
민족말살
(30년후~40년초)
-경찰력,군사력
-국가총동원체제
-민족문화말살
병참기지화정책
중화학공업육성
남면북양
농촌진흥운동(32~40)
어용운동
농산물수탈과 통제
공출과배급제실시(39)
신조선미곡증산계획 (1940)
조선식량관리령(43)
민족문화말살
-신사참배(36)
-황국신민화(38)
-한국어사용금 지&한국사금지
-창씨개명
-조선어학회사건(1942)
 

오답 해설>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이 시행된 것은 일제 강점기 말인 19412월의 일이다.

브나로드 운동이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추진된 것은 1930년대 전반기의 일이다(1931~1934).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이 설립된 것은 19279월의 일이다. 기존의 조선 노농 총동맹(1924.4)에서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으로 분리된 것이다.

내선일체를 강조한 황국 신민 서사의 암송이 강요된 것은 193710월 이후의 일이다.

정답>

'자료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라는 제목 아래 ()에는 '국무령에 이상룡이 취임하다'가 나와 있다. 석주 이상룡(1858~1932)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한 것은 19259월의 일이다. 이어 ()에는 '대일 선전(宣戰) 성명서를 발표하다'가 나와 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194112월의 일이다(1941.12.10). 마지막으로 ()에는 '창사에서 광저우로 청사를 이전하다'가 나와 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청사를 창사에서 광저우로 이전한 것은 19387월의 일이다(창사로 이동한 것은 193711, 광저우에서 다시 류저우로 이동한 것은 193811).

 

이상을 작성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된다.

정답>

검사의 '폭탄을 구해 숨겨 놓은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곽재기의 '재작년 3월 이후로 조선 독립을 평화적으로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하이로 가서 육혈포와 폭탄을 구해 피로써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이어 이성우의 '폭탄으로 고위 관리를 죽이고 중요 건물을 파괴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과 함께 ()/를 조직한 이유이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또한 '192167일 밀양 폭탄 사건 공판 기록'이라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 단체는 의열단임을 알 수 있다(1919.11).

의열단은 [단재 신채호(1880~1936)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다(1923.1).

1904 보안회 서울 무지개간철회 황보
1905 헌정연구회 서울 일진회에 대항
1906 대한자강 대한민보발해
1906 대한협회 대한자강회+대한구락부
1907 신민회 서울 안창호/양기탁등 105인사건
흥사단(LA)수양동우회
공화주의최초주장!
1909 국민회 미국 이승만대한국민회
1910 경학사 서간도(삼원보),한흥동(밀산부)
신흥무관학교
1911 동제사 상하이 신규식, 상해유학생조직
1912 독립의군부 전국적 임병찬, 고종의밀지, 복고주의
1913 대한광복단 국내 박상진,김좌진 , 공화주의
=1915 조선(대한)광복단()
1915 조선국권회복단 대구 서상일, 이시영, 단군, 시회
1918 신한청년당 상하이 김규식, 여운형,김구,
파리강화회의 김규식파견실패
1919 대한국민의회 연해주 손병희, 정부수립선언
 

오답 해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한 단체는 (대한)보안회이다(1904.7).

복벽주의를 내세우며 의병 전쟁을 준비한 단체는 (대한)독립 의군부이다(1912.9).`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는 건국 강령을 발표한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1941.11).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1901~1932)이 단원인 단체는 한인 애국단이다(1931.10).

*일본 도쿄에서 193218,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선 일왕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어졌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정답>

'나가사키에 원폭 희생자 위령비 세워져'라는 제목 아래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주도로 나가사키에 위령비가 세워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국민 징용령이 공포된 이후의 시기에 노동자 등으로 끌려갔다가 원폭으로 희생된 한국인을 추모하는 이 비의 건립은 강제 동원과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국민 징용령이 공포된 이후의 시기'라는 표현을 통해 주어진 자료에서 밑줄 친 '시기'는 일제 강점기 말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397월에 제정된 일제의 국민 징용령이 조선에도 적용된 것은 193910).

애국반이 조직되어 한국인의 생활을 통제한 것은 19387월부터의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애국반은 193877일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이 조직되면서 각 연맹 산하에 10호 단위로 만들어졌다. 참고로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은 194010월에 국민 총력 조선 연맹으로 개편되었다.

오답 해설>

강압적 통치를 목적으로 헌병 경찰 제도가 실시된 것은 1910년대이다(무단 통치 시기).

사회주의자를 탄압하기 위한 치안 유지법이 제정공포)된 것은 19254월의 일이다(같은 해 5월에 시행)

회사 설립 시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회사령이 공포된 것은 191012월의 일이다(허가제 회사령). 허가제 회사령은 19204월에 신고제(계출제) 회사령으로 바뀌었다(일본 자본과 회사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립을 명분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한 것은 1910년대이다(1910~1918).

정답>

왼쪽 말풍선에 '이 부부(오희영, 신송식)의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두 사람은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충칭에서 창립된 ()에서 첩보 담당 및 주석 비서로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오희영(1924~1969)은 부모, 동생이 모두 독립운동가이기도 합니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지청천(1888~1957)이 총사령관이고, 충칭에서 창립되었다는 표현을 통해 주어진 '()'는 한국 광복군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40.9.17).

한국 광복군은 1945년에 이르러 국내 정진군을 편성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하였다. 당시 한국 광복군은 미국 전략 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도움을 받아 1945818일 수도 서울 탈환을 목표로 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동년 8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작전이 무산되었다.

오답 해설>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승리한 것은 조선 혁명군(양세봉 총사령)이다(1932.3~7).

중국 팔로군에 편제되어 항일 전선에 참여한 것은 조선 의용군이다(1942.7, 1943년 이후부터 군정학교 학생과 교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팔로군에 배속).

중국 관내(關內)*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는 조선 의용대이다(1938.10).

*관내를 관중(關中)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중국 본토 지역을 가리킨다(만주, 즉 동북 3성은 관외). 예전 진()나라 때 수도인 장안 일대 주변에 4개의 관문을 설치한 것에서 연유한다.

간도 참변 이후 밀산에서 집결하여 자유시로 이동한 것은 대한 독립군단(총재 서일)이다(1920.12)(자유시 참변, 1921.6).

정답>

'우리는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직 민족 자결 원칙에 의하여 조국의 남북통일과 민주 독립을 촉진해야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리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회는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의 제안에 의하여 실현되는 남북 정치 협상을 저넉으로 지지하며, 아울러 그 성공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회',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의 제안에 의하여 실현되는 남북 정치 협상'이라는 표현에서 주어진 자료는 1948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협상**'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주어진 자료가 구체적으로 언제 발표된 것인지 정확하게 확인되진 않지만 '남북 연석 회의'에 제시할 조건과 김규식 (민족자주연맹) 주석의 참여 문제를 논의한 민족자주연맹 정치·상무위원회 연석 회의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1948.4.13~15, 4145개항의 참여 요구 조건 결정, 이른바 '남북 협상 5개 원칙').

*관두: 가장 중요한 지점

**남북 협상: 1948419일에서 23일까지 평양에서 '남북 연석 회의'[정식 명칭은 '남북조선(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뒤이어 남북한 주요 단체 대표들 간에 두 차례의 회의(427일과 30)가 또 열렸는데, 이를 '남북 지도자 협의회'[정식 명칭은 '남북조선(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라 한다. 그런데 또 '4김 회담'이라고 하여 김구와 김규식, 김일성과 김두봉 간의 회담이 426일과 30일에 각 진행되었다. 보통 엄밀한 의미에서의 남북 연석 회의는 419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본회의를 지칭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통설은 419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연석 회의 본회의와 남북 지도자 협의회, 4김 회담을 모두 통틀어 '남북 연석 회의'(이른바 '남북 협상')라고 부르고 있다.

19484월에 남북 협상이 벌어진 원인은 같은 해 2월에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결의되었기 때문이다(1948.2.26).

오답 해설>

허정 과도 정부*에서 헌법이 개정된 것은 19606월의 일이다(3차 개헌).

*허정 과도 정부: 1공화국 붕괴 직후인 1960427일 구성되어 1960615일까지 존속한 과도 정부이다(3차 개헌 이룸). 같은 해 729일 총선거를 거쳐서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대통령이 선출된 것은 제7차 개헌[유신 헌법]이 이루어진 197212월 이후의 일이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 원칙의 농지 개혁법이 제정된 것은 19496월의 일이다(1949.6.21). 참고로 농지 개혁법이 공포된 것은 1950310일의 일이다.

국가 보안법 개정안(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보안법 파동이 일어난 것은 195812월의 일이다(1958.12.25, 일명 '2·4 파동').

정답> ⑤

(가)에 '군사적 안전 보장의 입장에서 볼 때 태평양 지역의 정세 및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어떤 것인가. 태평양 지역 방위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 필리핀 군도로 이어진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1950년 1월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이른바 '애치슨 선언'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애치슨 선언이란, 1950년 1월 10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1893~1971)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을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필리핀 선으로 한다고 언명한 것을 말한다.

(나)에는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락해 주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 한국과 미국 간에 체결된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제4조, 1953.10.1).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있던 반공 포로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석방된 것은 1953년 6월의 일이다(1953.6.18).

오답 해설>

① 좌우 합작 위원회가 출범한 것은 1946년 7월의 일이다(1946.7.25). 참고로 '좌우 합작 7원칙'이 발표된 것은 같은 해 10월 7일이다.

② 여수 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48년 10월의 일이다(1948.10.19).

③ 미국 의회에서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은 1947년 3월의 일이다(1947.3.12).

④ 베트남 파병에 관한 브라운 각서가 체결된 것은 1966년 3월의 일이다(1966.3.7).

정답>

왼쪽 말풍선에 '이번 선거에 자유당, 민주당 후보 등 여러 명이 출마했군'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여당은 현 대통령의 3선을, 야당은 정권 교체를 주장하고 있군'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주어진 사진(포스터)에서는 맨왼쪽에 조봉암[당시 무소속], 그 다음에 '신익희와 장면[이상 민주당]''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맨오른쪽에는 '이승만[리승만]과 이기붕[리기붕][이상 자유당]'이 보인다. 따라서 주어진 자료는 19565월에 치러진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56.5.15).

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이 선전하였고, 조봉암은 이에 힘입어 (평화 통일론을 내세우며) 진보당을 창당하였다(1956.11.10).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구속하고, 진보당을 해체시켰다(1958.1/1958.2).

오답 해설>

국회에서 국민 방위군 사건*이 폭로된 것은 19511월의 일이다(115'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 결성). 국회에서 국민 방위군의 해체가 결의된 것은 같은 해 4월이다(1951.4.30).

*6·25 전쟁 1·4 후퇴 당시 국민 방위군의 일부 고급 장교들의 부정부패에 의해 약 9만 명의 장정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사망한 사건이다.

경찰이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를 습격한 것은 194966일의 일이다(6·6 반민특위 습격 사건*).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 습격(1949.6.6), 국회 프락치 사건(19494월 말~8월 중순) 등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박으로 인해 결국 19497반민족행위처벌법(공소)시효가 8월로 앞당겨지게 되었고, 동년 9월 다시 법률이 개정되어 특별 조사 위원회, 특별 재판부, 특별 검찰부가 해체되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지부가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기 시작한 것은 19459월부터이다(~11). 같은 해 96일 건국 준비 위원회가 조선 인민 공화국으로 개편됨에 따라 11월까지 전국 각지의 건국 준비 위원회 지방 조직[지부]들과 각종의 자생적 조직들이 전환되어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폐지하는 개헌안이 통과된 것은 195411월의 일이다(1954.11.27, 사사오입 개헌).

정답>

'이 사진은 남북 학생 회담을 요구하는 집회 장면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당시 대학생들은 판문점에서 만나자는 구호를 외치며 협상을 통한 자주적인 통일을 주장하였으나, 정부는 남북 총선거에 의한 평화 통일 정책을 제시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960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 시기에 통일 논의[운동]이 크게 일어났는데, 위 자료는 19615월 남북 학생 회담을 요구하는 집회이다. 사진 속 문구는 '이 땅이 뉘 땅엔데 오도 가도 못하는가, 가자 으로! 오라 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이다.

 

연표에서는 19604·19 혁명과 19646·3 시위 사이인 '() 시기'에 해당한다.

 

정답>

'이것은 경제 관련 긴급 명령을 발표하는 사진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경부 고속 도로 개통 등으로 경제 발전에 힘쓰던 당시 정부는 사채에 허덕이는 기억을 구제하기 위해 사채 신고를 독려하고 그 상환을 동결시켜 주었습니다. 이로써 기업의 재무 구조가 개선되었으나 전경 유착이 심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위와 같은 경제 관련 긴급 명령('경제 안정과 성장을 위한 긴급 명령 제15, 이른바 '8·3 조치')이 발표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28월의 일이다(1972.8.3). 무리한 외자 도입으로 기업들이 부도 위기에 몰리자 박정희 정부가 기업이 안고 있는 사채 동결과 금리 인하 등을 골자로 하는 '8·3 조치'를 발표하였다.

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의 일이다(1972~1976).

오답 해설>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FTA)을 체결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의 일이다(2007.6). 참고로 협정이 발효된 것은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23월이다.

귀속 재산 처리를 위해 신한 공사가 설립된 것은 미군정기인 19463월의 일이다(~1948.3).

최저 임금 결정을 위한 최저 임금 위원회가 설치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의 일이다(1987.7.30).

금융 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고자 금융 실명제가 실시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의 일이다.(1993.8.12).

정답>

'()의 현장을 찾아서'라는 제목 아래 명동 성당(박종철 고문 은폐 조작 발표 장소), 향린 교회(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 발기인 대회 개최지), 성공회 성당(6·10 국민 대회가 시작된 곳)이 차례로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1987년에 일어난 6월 민주 항쟁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내세운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된 민주화 운동이 바로 6월 민주 항쟁이다.

오답 해설>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1980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민주화 운동 역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2011년에 등재).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시위대가 경무대로 행진한 민주화 운동은 1960년의 4·19 혁명이다.

(재야인사들이) 3·1 민주 구국 선언을 통해 긴급 조치 철폐 등을 요구한 것은 19763월의 일이다.

정답>

'·미 정상, 도라산역 방문'이라는 제목 아래 '오늘 대통령은 경의선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도라산역을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함께 방문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정부는 이 역의 준공으로 우리나라가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물류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1946~)(43)이 도라산역*을 방문한 것은 2002220일로, 이때는 김대중 정부 시기에 해당한다(1998.2~2003.2).

*도라산역: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 민통선 안에 있는 경의선의 최북단역이다. 경의선 복원 사업에 의해 20022월 초 도라산역이 들어섰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6월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고, 당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6·15 남북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오답 해설>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7·7 선언이 발표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의 일이다(1988.7.7).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과 예술 공연단 교환이 실현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의 일이다(1985.9.20~22).

7·4 남북 공동 성명을 실천하기 위한 남북 조절 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의 일이다(1972.11~1973.8).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교환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의 일이다(1991.12.13).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일명 '남북 기본 합의서'라고 부른다.

정답>

'역사 속 왕의 호칭'이라는 제목 아래 '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이름을 높여 부르는 호칭을 묘호라고 한다. 원칙적으로 나라를 세운 왕은 '()', 그 나머지는 '()'을 붙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묘호를 쓴 왕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다. 고려 시대에는 태조만 조의 묘호가 붙여졌지만, 조선 시대에는 다양한 이유로 정조처럼 조를 붙인 왕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충렬왕처럼 조, 종을 붙이지 못한 왕들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연산군, 광해군처럼 묘호를 받지 못하고 군으로 격하되어 불린 경우도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왕은 (광해군이 아니라) 연산군이다(1506). 광해군이 폐위된 것은 인조반정 때이다(1623).

오답 해설>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29)은 백제를 명망시키고 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적절한 의견이다.

고려 태조(재위 918-943)는 고려 건국의 위업을 이루었다. 적절한 의견이다.

조선 정조(재위 1776-1800, 22)는 탕평책 등 여러 개혁으로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적절한 의견이다.

고려 충렬왕(재위 1274-1308, 25)은 원 황실의 부마가 되었다. 적절한 의견이다. 태자였던 고려 원종 12(1271)에 원에 가서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나는 방호별감 김윤후입니다.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 충주산성을 방어할 때 ()의 신분 문서를 불태워 그들의 사기를 높였습니다'는 말이 나와 있다. 몽골의 제5차 침입 시에 있었던 충주()성 전투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1253, 고려 고종 40).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나는 군국기무처의 총재 김홍집입니다. 신분 차별 폐지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여 ()에 관한 법을 폐지하였습니다'는 말이 나와 있다. 1차 갑오개혁 때에 있었던 노비제 폐지의 일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894, 조선 고종 31). 이를 통해 주어진 '() 신분'은 노비임을 알 수 있다(천인의 일종으로 그 수가 많아 사실상 천인의 대부분을 차지).

조선 순조 때 궁방과 중앙 관서에 소속된 (관노비) 6만여 명이 해당되었다(1801, 순조 원년).

오답 해설>

신라에서 승진에 제한을 받았으며, 득난(得難)이라고도 불린 신분은 6두품이다. 17관등 중 6관등 아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고려 시대에 향, 부곡, 소에 거주하였으며, 과중한 세금을 부담한 신분은 양인이다. 양인에는 이처럼 향, , 부곡 거주민과 농민(백정)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 봉수, 역졸의 업무를 주로 담당한 신분은 양인[상민]이다. 그런데 신분은 양인인데 누구나 기피하는 고된 역에 종사한 사람들을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 한다.

*신량역천: 고려 시대 이래 봉수간(烽燧干염간(鹽干·진척(津尺화척(禾尺양수척(楊水尺) 이나 으로 칭하는 자가 여기에 해당하였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밖에도 수군(水軍조례(皂隷나장(羅將일수(日守조졸(漕卒역졸(驛卒봉군(烽軍)의 칠반천역(七班賤役)도 포함되었다.

조선 후기에 통청 운동으로 청요직 진출을 시도한 신분은 중인의 일종인 서얼이다(조선 후기 중인에는 기술직 중인도 있음). 결국 철종 2년인 1851년에 신해허통이 이루어져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법적 규제가 철폐되었다.

정답>

'푸른 새잎을 밟는 날, 답청절(踏靑節)'이라는 제목 아래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중삼일(重三日)은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날에는 들에 나가 푸른 새잎을 밟는 풍습이 있어 답청절이라고 부른다. 답청의 풍습은 신윤복의 <연소답청(年少踏靑)>에 잘 나타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날짜는 음력 33, 음식으로는 화전, 쑥떡, 풍습으로는 노랑나비 날리기, 활쏘기'가 차례로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가 가리키는 세시 풍속은, (삼월) 삼짇날임을 알 수 있다. 답청절 외에 '강남갔던제비오는날'. 삼월삼질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다.

오답 해설>

칠석은 매년 음력 77일에 행하는 명절이다[(칠월) 칠석].

한식은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양력으로는 대개 45일경)에 지내는 명절이다.

동지는 매년 음력 11월 중순에 지내는 명절이다. '작은 설'이라고도 하였다.

단오는 매년 음력 55일에 지내는 명절이다[(오월) 단오]. 우리말로 '수릿날'이라고 한다.

정답>

'답사 보고서'라는 제목 아래, 개관으로 '금성산과 영산강을 끼고 있는 우리 고장은 삼한 시대부터 마한의 주요 지역 가운데 하나로 발전하였고, 후삼국 시대에는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의 의기가 드높았던 지역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전라도라는 이름은 전주와 우리 고장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또 목차에는 '1. 마한 세력의 성장, 반남면 고분군', '2. □□()의 관아 부속 건물', '3.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도화선, □□'이 차례로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에서 가리키는 지역은 전남 나주임을 알 수 있다.

왕건이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기 위해 차지하였던 지역이 바로 전남 나주이다. 당시 나주는 후백제의 세력권으로 '금주'라는 명칭으로 불렸다(903년부터 공략하여 910년경 사실상 장악하였다).

오답 해설>

인조(재위 1623-1649, 16)가 피신하여 청군과 항전한 지역은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남한산성이다(1636.12~1637.1)(병자호란).

유생 출신 (의암) 유인석(1842~1915)이 의병을 일으킨 지역은 충북 제천이다(1896.1~6).

정문부(1565~1624)가 왜군에 맞서 북관대첩을 이끈 지역은 함경도 북부인 북관 지역(경성과 길주 등)이다(1592.9~1593.2). 북관대첩은 일종의 북관 지역 수복 전투였다.

김광제(1866~1920) 등을 중심으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된 지역은 대구이다(1907.2~1908.7).

정답>

'19461월에 작성된 연합국 최고 사령부 문서에는 제주도, 울릉도, ()/가 우리 영토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는 우리나라 동쪽 끝에 있는 섬입니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는 독도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연합국 총사령부(최고 사령부) 훈령 제677호이다. 19466월 훈령 제1033호에서도 일본 어부들이 독도와 그 12해리 수역에 접근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여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영국군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불법 점령한 섬은 거제도이다. 거문도는 전남 여수시에 속하는 섬으로,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이 있어난 것은 고종 22년인 18854월의 일이다(~1887.2).

오답 해설>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한 섬은 독도이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의 막부 정부가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에 두 차례 건너갔다[첫 번째는 1693(숙종 19)이고, 두 번째는 1696(숙종 22)].

러일 전쟁 때 일본이 불법으로 자국 영토로 편입한 섬 역시 독도이다(1905.2). 당시 일본은 독도를 무인도로 규정하고, 시마네 현에 편입시켰다.

대한 제국이 칙령을 통해 울릉 군수가 관할하도록 한 섬도 독도이다(대한 제국 칙령 제41, 1900.10).

1877(일본의) 태정권 문서에 (독도는) 일본과는 무관한 지역임이 명시되었다(1877.3). 옳은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