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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알기쉽게 정리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57회 심화 문제와 해설 정리 (1) + 암기법

정답> ③

'김해의 초대형 고인돌, 무덤으로 확인'이라는 제목 아래 '김해 구산동의 무게 350톤 규모의 초대형 고인돌에서 매장 주체부가 발굴되어 무덤으로 확인되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고인돌은 그 규모와 출토 유물을 통해서 사유 재산과 계급이 발생한 () 시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는 청동기 시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반달 돌칼을 사용하여 곡식을 수확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오답 해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 시대의 일이다. 이때에 이르러 밭농사에서 23작의 윤작법이 보급되었으며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는 논농사에서 모내기법(이앙법)도 행해졌다.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사람들이) 산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실을 뽑기 위해 가락바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주먹도끼, 찍개 등의 뗀석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정답> ⑤
'한국사 묻고 답하기'라는 제목 아래 질문으로 '개천절에 대해 알
려 주세요'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이에 대한 답변으로 '단군왕검
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이 나라를 건국한 것을 기리는 뜻
으로 제정된 국경일입니다'라는 답, '1909년 대종교에서 개천일
로 이름 짓고 기념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는 답, '매년 10월
3일에는 마니산 참성단에서 이 나라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행됩니다'는 답이 차례로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나라'는 고조선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는 살인, 절도 등의 죄를 다스리는 범금 8조가 있었다.

* 단군신화의 특징

1.특징-단기원년(BC2333)고고학적으로신석기

2.모계사회웅녀

3.곰 토템사회동물숭배

4.제정일치사회단군+왕검

5.의약지식쑥 마늘

6.고려시대에 부각원간섭기(식민지하)

7.태양숭배사상햇빛을 보지 아니~

8.문헌기록-삼국유사,제왕운기,세종실록지리지,응제시주,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역대총목,동사강목,동국통감

9.신석기(단군조선)-청동기(고조선)-철기(위만조선)

10.고조선8조금법(3조법만전해짐):살인, 절도, +간음

11.부여4대금법: 살인,절도(112),간음,투기

오답 해설>
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의 왕경인) 금성을 공격한 나라는 가야이다(400).
②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한 나라는 신라이다. 17대 내물마립간(재위 356-402)에서 21대 소지마립간(479-500)까지 약150년간 사용되었다.
③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을 실시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④ 목지국을 압도하고 지역의 맹주로 발돋움한 나라는 백제(국)이다.

정답> ②
(가)에 '그 나라에는 왕이 있고, 벼슬로는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이 있으며, 신분의 높고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0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에서 가리키는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나)에는 '그 나라의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책화') . 이어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이라 한다. 또 호랑이
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에서 가리키는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임을 알 수 있
다.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혼인 풍습이 있었다. 일명 데릴사위제, 예서제라고도 부른다.

* 초기국가들의 생활상


*부족장(마가,우가,저가,구가)가신(대사,사자,대사자)
-5부족연맹,4출도지배,연맹국가
4대금법
형사취수
흰옷숭상
순장,112
-금와전설
-뇌옥(감옥)
-중국과친선
(고구려)
고구려 5(소계절관순)
大加가신(사자,조의,선인)
수상(상가,대로,패자)관리
예서제(서옥제)
=데릴사위제
동맹,112
*형사취수제
감옥X
절약과침략
옥저 X 거수,,읍군,삼로
*지리적이유로 중국문화수입을 하지 못하여 군장국가까지만 머무름
예부제
=민며느리제
가족묘,세골장
두벌묻기쌀항아리
오곡,맥포
해산물풍부
동예 책화,방직기술
무천(10)
단궁,반어피
과하마
삼한 제정분리(신구문화갈등완충지)
종교(천군-소도)
정치(신지,읍차,부례)
제천행사(5,10)
두레,상투,문신
벼농사
 


오답 해설>
①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한 나라는 (고구려가 아니라) 삼한의
변한이다.
③ 연의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은 나라는 (동예가 아니라) 고조
선이다.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 초에 연의 장수 진개(?~?)의 공
격을 받아 영토(고조선 서방 2천여 리)를 빼앗긴 적이 있다.
④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다스린 나라는 (동예가 아니라)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⑤ 골품에 따라 관등 승진에 제한이 있었던 나라는 (고구려나 동
예가 아니라) 신라이다.

정답> ②
왼쪽 말풍선에 '삼산관을 쓰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의 이 불상을 가상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니 너무 신기하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나도 그래. 다음 전시실에는 이 불상과 재료만 다를 뿐 모습이 매우 닮은 일본 교토 고류사의 불상이 있다고 해. 그것도 보러가자'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불상'은 삼국 시대 신라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선지②에 주어진 반가 사유상은 부처의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보관(寶冠), 즉 삼산관(三山冠)을 쓴, 국보 제83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참고로 부처가 복잡한 보관을 쓴 국보 제78호 금동 미
륵보살 반가 사유상도 있다. 또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은 현재 일본의 국보 제1호이다(7세기경).
오답 해설>
① 경주 구황동 금제 여래 입상이다(국보 제80호)이다. 경주 황복사
지 삼층 석탑(국보 제37호) 해체 수리 공사 중에 경주 구황동 금제
여래 좌상(국보 제79호)*와 함께 발견되었다. 대좌와 광배도 갖춘
겹꽃잎의 복련대 위에 꼿꼿이 선 불상으로,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다[(통일) 신라 성덕왕 4년(706)으로 추정].
*심화 제52회 6번 출제
③ 발해의 이불병좌상이다. 석가불(석가여래불)과 다보불(다보여래불)
이 만나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불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④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이다(539, 고구려 안원왕
9). 고구려의 승려들이 만들어 유포한 천불(天佛) 중의 하나로, 경상
남도 의령에서 출토되었다(국보 제119호).
⑤ 광주 춘궁리 철불로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 이전까지 석불, 금동
불이 주류를 이루다가 고려 초인 10세기 말부터 철불이 유행하였다.

정답> ③
'이 동상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내
용의 국서를 양나라에 보내는 (가)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또한 동상 앞 석상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축조한 (가)의 무덤에서 출토된 진묘수 모형
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가)'는
백제의 제25대 왕인 무령왕(재위 501-523)을 가리킴을 알 수 있
다.
무령왕은 지방에 22담로를 두어 왕족을 파견하였다.

무녕왕 6 중국남조의 양과 교류22담로제실시(왕자,왕족파견)벽돌무덤(지석-현존최고지석, 토지매매권)무남조22
 


오답 해설>
① (전북)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의) 왕은 무왕(재위
600-641, 제30대)이다(639, 무왕 40).
②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 (백제의) 왕은 성왕(재
위 523-554, 제26대)이다(538, 성왕 16).
④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의) 왕은 근초
고왕(재위 346-375, 제13대)이다(371, 근초고왕 26).
⑤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수용한 (백제의) 왕은
침류왕(재위 384-385, 제15대)이다(384, 침류왕 원년).

<업적>

중국남조의 양과 교류22담로제실시(왕자,왕족파견)벽돌무덤(지석-현존최고지석, 토지매매권)무남조22

 

정답> ④
'대한민국 방방곡곡 - 함양 상림'이라는 제목 아래 '이번에 소개할
곳은 함양 상림입니다. 이 숲은 당에서 귀국한 (가)이/가 천령군(현
함양군) 태수로 부임하였을 때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하였다고
합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펴본 (가)
은/는 개혁 방안을 담은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 여왕에게 올렸습니
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가)'는 고운 최
치원(857~?)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894, 진성 여왕 8).
최치원은 신라 말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해인사 묘길상탑기(海印寺妙
吉祥塔記)를 남겼다. 여기에는 (통일) 신라 말 진성 여왕 9년인 895
년에 발생한 초적(草賊)의 약탈과 전란에서 불교 사원을 지키다 희
생된 승려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삼층 석탑(길상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오답 해설>
① 유식의 교의를 담은 해심밀경소, 인왕경소 등을 저술한 인물은 신라의 고승 원측(613~696)이다. 원측은 중국의 삼장법사 현장(602~664)에게서 유식학(唯識學)을 배운 후 자신만의 독자적인 유식사상 체계를 수립하였다(중국에서 활동).
② 외교 문서 작성에 능하여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 등을 작성한 인물은 강수(?~692)이다.
*태종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629~694)을 보내줄 것을 청하는 글
③ 한자의 음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이두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은 설총(655~?)이다. 원효의 아들이기도 하다.
⑤ 종파 간의 사상적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십문화쟁론을 지은 인물은 신라의 고승 화쟁국사 원효(617~686)이다.

정답> ①
(가)에 '백제의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때 도독인 이찬 품석과 사지(舍知) 죽죽, 용석 등
이 죽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윤충(?~?)의 (신라) 대야성 함락
은 백제 의자왕 2년인 642년의 일이다.
(나)에는 '신라와 당의 군사들이 의자왕의 도성을 에워싸기 위하
여 소부리 벌판으로 나아갔다. 소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전진
하지 않자 김유신이 그를 달래서 두 나라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일제히 떨쳐 일어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도성[사비성]을 포위 공격한 것은 660년의 일이다.
(다)에는 '흑치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
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 흑치상지가 별부장 사타
상여를 데리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과 호응하였다'는 내용
이 나와 있다. (달솔) 흑치상지(630?~689)가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한 것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의 일이다. 임존성(오늘날 충
남 예산 대흥)을 거점으로 하여 3만 명의 병력을 수습하고, 당군
을 격퇴하면서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정답> ④
위의 사료에 '완산주를 다시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를 나누어 청주(菁州)를 두니 처음으로 9주가 되었다. 대아
찬 복세를 총관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완산주를 설치
하고 청주를 두어 처음으로 9주가 되었다는 표현에서 주어진 자
료는 (통일) 신라 신문왕 대의 지방 행정 구역 정비(9주* 5소경)
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685, 신문왕 5).
*9주의 명칭이 '한주'. '삭주', '명주' 이렇게 한자식으로 개칭된 것은
경덕왕 때(재위 742-765, 제35대)의 일이다.
아래의 사료에는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를 사신(仕臣)으
로 삼았다. 남원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주민을 옮겨 그
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서원소경(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지금의 남원)을 설치하고, 557년(진흥왕 18)에
설치되었던 국원소경(지금의 충주)을 중원소경으로 개칭하여 마
침내 5소경으로 정비한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5년인 685년의
일이다. 이를 통해 주어진 두 자료는 모두 (통일) 신라 신문왕(재
위 681-692, 제31대)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관료전이 지급되고 녹읍이 폐지된 것은 모두 신문왕 대의 일이다
[각 687(신문왕 7)/689(신문왕 9)].
오답 해설>
① 금관가야가 멸망한 것은 532년(신라 법흥왕 19)의 일이다(신
라에 병합).
②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인
512년의 일이다.
③ 조세를 관장하는 품주(稟主)가 설치된 것은 신라 진흥왕 26년
인 565년의 일이다. 품주는 이후 설치되는 집사부와 창부(倉部)
의 전신으로, 진덕 여왕 5년인 651년까지 존속하였다.
⑤ 인재 등용을 위한 독서삼품과가 실시된 것은 (통일) 신라 원
성왕 4년인 788년의 일이다.

<신문왕업적>

9서당정비(중앙군정비),95소경정비(지방제도정비), 녹읍x(관료전지급),국학, 예작부, 공장부,

김흠돌모반사건, 설총-화왕계

정답> ①
'[그 나라의] 관제에는 선조성이 있는데, 좌상·좌평장사·시중·좌상시·간의가 소속되어 있다. 중대성에는 우상·우평장사·내사·조고사인이 소속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정당성에는 대내
상 1명을 좌·우상의 위에 두었고, 좌·우사정 각 1명을 좌·우평장사의 아래에 배치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제도는 발해의 중앙 제도[중앙 관제]임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교육 기관[국립 대학]으로 주자감을 두었다.
오답 해설>
②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국가는 고구려이다(400, 고구려 광개토 대왕 10).
③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갖춘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685,신문왕 5).
④ 개국, 태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신라이다(6세기 진흥왕 대)
⑤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이 지배층을 이룬 국가는 백제이다(부여씨→고구려 동명왕 계통). 왕비족으로 진씨와 해씨가 있었고, 귀족으로 사씨(사택씨), 연씨, 국씨, 목씨, 백씨, 협씨가 있었다.

'연호 정개(正開)가 새겨진 편운화상 승탑'이라는 제목 아래 '전북남원 실상사 조계암터에 있는 이 승탑에는 '정개 10년 경오(正開十年庚午)'가 새겨져 있어 건립 연도를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
다. 이어 '정개는 백제의 원한을 풀겠다고 선언하며 완산주에 나라를 세운 (가)이/가 사용한 연호*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가)'는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북 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연호(年號)란 중국에서 비롯된 군주 국가의 기년법(紀年法)(과거의 어떤 해를 기점으로서 해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군주의 치세(治世)에 붙이는 칭호이다. 원호(元號), 다년호(大年號)라고도 하며, 중국 한(漢) 무
제(武帝) 때의 건원(建元)이 최초의 연호이다. 원칙적으로 연호는 황제만이 사용하고, 제후왕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연호가 있다 함은 그 나라의 '독자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견훤은 927년 공산(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을 크게 무찔렀다.
오답 해설>
② 귀순한 김순식(?~?)에게 왕씨 성을 하사(따라서 '왕순식'이 됨)한
인물은 고려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다(922, 태조 5).
③ 폐정 개혁을 목표로 정치도감을 설치한 인물은 충목왕(재위
1344-1348, 제29대)이다(1347, 충목왕 3). 하지만 부원 세력들의 반
발로 본격적 활동은 3개월 만에 와해되고, 정치도감도 결국 2년 뒤
인 1349년(충정왕 원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또 사실 정치도감을 설
치하게 된 계기는 원 혜종(재위 1333-1368, 제15대)의 명령 때문이
었다.
④ 청해진을 근거지로 해상 무역을 전개한 인물은 장보고(?~846)이
다[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⑤ 광평성을 설치하고 광치나, 서사 등의 관원을 둔 인물은 후고구
려를 세운 궁예(?~918)이다(904).

정답> ④
'행영병마별감 승선 최홍정과 병마사 이부상서 문관이 여진 추장거위이 등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너희가 9성의 반환을 요청했으니 마땅히 이전에 했던 약속처럼 하늘에 대해 맹세하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추장 등은 함주 성문의 밖에 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 대대소손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우리 나라[蕃土]는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맹세를 마치고 물러갔다. 최홍정 등은 길주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9성의 전투장비와 군량을 내지(內地)로 들여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9성의 반환'과 '여진 추장'이라는 표현을 통해 주어진 자료는 고려의 '동북 9성 반환'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1109, 예종 4).
주어진 연표에서는 별무반 편성(1104, 숙종 9)과 이자겸의 난(1126, 인종 4) 사이의 시기인 '(라) 시기'에 해당한다.

10~
11C
거란 광군사 1차서희(강동6) 2차양규 3차강감찬(귀주)
침입영향 : 나성축조, 천리장성, 7대실록편찬(현종),초조대장경조판, 고송거의세력균형
 

정답> ②
'안성 망이산성에서 '준풍 4년(峻豊四年)'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습니다. 준풍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던 이 왕은백관의 공복을 정하고 개경을 황도로 명명하는 등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확립을 도모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밑줄 그은 '이 왕'은 고려의 제4대 왕인 광종(재위 949-975)임을 알 수 있다.
*고려 광종은 즉위년(949)에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
고, 광종 11년인 960년에 이르러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로 바꿔 사용
하였다. 따라서 준풍 4년은 963년임을 알 수 있다.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가 시행된 것은 광종 9년인 958년의 일이다.



 
 
 
광덕,준풍(연호)
과거제(쌍기,무과X)
귀법사-화엄종
비안검법 교장려
 
거제도
 
위보
 
 
신숙청
 
과외교
 
법사
 
 
복제정
 


 
 
 

오답 해설>
① 12목에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성종 2년인 983년의 일이다.
③ (최씨 무신 정권 집권자인 최우에 의해) 대장도감에서 팔만대
장경이 간행된 것은 고종 23년인 1236년에서 고종 38년인 1251
년까지의 일이다. 1236년에 피난 도읍지인 강화에 대장도감 본사
를 두고, 진주(晋州) 관내의 남해현에 분사를 두어 판각을 분담시
켰다.
④ 안우(?~1362), 이방실(1298~1362) 등이 홍건적을 격파한 것은
홍건적의 제2차 침입 시의 일이다(1361, 공민왕 10). 홍건적이
침략한 것은 두 차례로 제1차 침입은 고려 공민왕 8년인 1359년
이고, 제2차 침입은 공민왕 10년인 1361년에 일어났다. 참고로
이방실은 홍건적의 1차 침입 시에도 격파에 기여하였고, 공민왕
은 2차 침입 시 복주(지금의 경북 안동)까지 피난하였다.
⑤ 신돈(?~1371)이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가 된 것은 공민왕 15년인 1366년의 일이다.

정답> ③
'왕이 명을 내리기를, 양계와 5도의 진병법석(鎭兵法席)*에 사용되는 비용은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어 '이것은 부처를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것이니 무슨
복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내고(內庫)의 은병 300개를 내어서 여러 도에 나누어 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진병법석: 병화(兵禍)를 물리치기 위해 거행한 불교 의식
'양계'와 '5도'라는 명칭에서 주어진 자료는 고려 시대(지방 행정조직)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경시서*의 관리들이 시전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감독하였다.
*경시서의 관리들이 수도[개경]의 시전을 감독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목종 대(재위 997-1009, 제7대)로 추정된다(경시서 자체는 그 이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 그러다 고려 문종 대(재위 1046-1083, 제11
대)에 이르러 경시서의 직제가 확대되었다. 이후 경시서는 조선 초에도 계속 존속되다가 세조 12년(1466)에 관제를 개혁할 때 평시서(平市署)로 개칭되었다.
오답 해설>
① 백동화를 주조하는 전환국이 설치된 것은 조선 고종 20년인 1883년의 일이다.
② 신해통공이 시행된 것은 조선 정조 15년인 1791년의 일이다.
신해통공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
④ 담배, 인삼 등의 상품 작물이 재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물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광산을 운영하는 덕대가 등장한 것도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정답> ③
'지원(至元) 7년*, 원종이 강화에서 송경(松京)으로 환도할 적에
장군 홍문계 등이 나라를 그르친 권신 임유무를 죽이고 왕이 정
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권신
의 가병, 신의군 등의 부대가 승화후(承化侯)를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면서, 미처 강화를 떠나지 못한 신료와 군사들을 강제로
이끌고 남쪽으로 항해하여 가니 배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원종이 송경[개경]으로 환도'하고 '삼별초'가
개경으로의 환도에 저항하는 표현을 통하여 주어진 자료는 원종
11년인 1270년의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원 세조 쿠빌라이 때(재위 1264-1294) 사용한 연호로 지원 7년
은 1270년에 해당한다. 이후 원 혜종 때도 같은 명칭의 연호가
사용된 적이 있는데 구분하기 위하여 보통 '후지원(後至元)'이라
고 부른다(1335~1341년 6년간 사용).
김방경(1212~1300)의 군대가 탐라(지금의 제주도)에서 삼별초를
진압한 것은 고려 원종 14년인 1273년 6월의 일이다. 삼별초는
1270년 6월에서 1271년 5월까지 진도에서, 이어 1271년 5월에
서 1273년 6월까지 제주도에서 항전하였다.
오답 해설>
① 김윤후(?~?)가 처인성(지금의 경기도 용인)에서 몽골군을 격퇴
한 것은 몽골의 제2차 침입 시의 일이다(1232, 고려 고종 19).
② 묘청(?~1135)이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한 것은 고려
인종 대의 일이다(1135, 고려 인종 13, 서경 천도 운동).
④ 최충헌(1149~1219)이 (이의민을 축출하고 집권한 직후) 봉사
10조를 올려 시정 개혁을 건의한 것은 고려 명종 26년인 1196년
의 일이다.
⑤ 경대승(1154~1183)이 정중부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은 고려 명종 9년인 1179년의 일이다. 사병 집단인 도방을 처
음 설치하였다.

정답> ①
맨왼쪽의 말풍선에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가운데 말풍선에는 '공민왕 때 지붕을 크게 수리했다는 상량문의 기록을 통해 건축 연
대를 추정할 수 있지'라는 말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이야'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대화
속 문화유산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국보 제
15호로 13세기 초 내지 중반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오답 해설>
② 보은 법주사 팔상전은 조선 후기인 17세기의 건축물로,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이다(국보 제55호). 정유재란 때 불에 탔는데, 인
조 4년(1626)에 다시 축조하였다. 벽의 사방에 각 면 2개씩 모두 8
개의 변상도(變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변상도: 일종의 종교화로, 불교 경전의 내용이나 그 교의를 알기 쉽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③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17세기의 건축물이다(국보 제67호).
④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대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1308, 충렬왕 34, 국보 제49호). 참고로 수덕사는 삼국 시대 백제
말인 7세기 중엽에 창건되었다.
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이다(국보 제18
호). 배흘림기둥에 주심포 양식으로 축조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정답> ①
'정부, 관학 진흥에 힘쓰다'는 제목 아래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에 학생이 몰려들어 사학이 크게 융성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러한 상황에서 국자감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정부는 제술업, 명경업 등에 새로 응시하려는 사람은 국자감에 300일 이상 출석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드는 등 관학을 진흥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로써 고려 시대의 관학 진흥책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장학 재단인) 양현고를 두어 장학 기금을 마련한 것은 고려 예종 14년인 1119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② 서원을 세워 후진 양성과 선현 제향에 힘쓴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일이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이 조선 중종 38년인
1543년에 세워졌다.
③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여 문
신들을 재교육한 것은 조선 정조 5년인 1781년의 일이다.
④ (일종의 독서당인) 만권당을 설립하여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
게 한 것은 고려 충숙왕 원년인 1314년의 일이다. 상왕이 된 충
선왕이 원의 연경[지금의 북경]에 만권당을 세우고 익재[역옹] 이
제현(1287~1367)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을 불렀다.
⑤ (지방 교육 기관인) 경당을 설치하여 청소년에게 글과 활쏘기
를 가르친 것은 고구려 장수왕 15년인 427년 이후의 일이다(평
양 천도 이후).






관학진흥(보칠양청)
혜민약국
감무파견-중앙집권책











현고




제도감 민국





정답> ④
'이것은 마천목을 좌명공신에 봉한다는 녹권입니다. 마천목은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회안공 이방간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가)이/가 승리할 수 있도록 앞장섰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가)은/는 마천목을 3등 공신으로 책봉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제2차 왕자의 난'*이라는 표현에서 주어진 자료 속 '(가)'는 조선의
제3대 국왕인 태종 이방원(1367~1422, 재위 1400-1418)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태조 7년인 1398년 8월에 일어난 것이 첫 번째이고(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무인정사의 난, 또는 정도전의 난이라고 함), 1400년 1월에 일어난 것이 두 번째이다(제2차 왕자의 난,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 이라고 함).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6조 직계제를 (처음) 실시하였다(1414, 태종 14). 참고로 세조 원년인 1455년에 6조 직계제가 다시 시행되었다.

태종
이방원
*금인고명문제해결-명에게인정
*1차왕자의난(방원의난)2차왕자의난(방간,박포의난)
*왕권강화: 사병혁파, 6조직계제(세조), 의정부(정종)
*양전사업, 공도정책, 사민정책
*호패법-유민방지,인력확보,노비포함,3(세조,광숙인)
*주자소설치(계미자),억불숭유(도첩제강화),노비변정도감,5부학당(4부학당),신문고,거북선(귀선)건조,아악서
*서얼차별법,재가금지(양반수제재)
*지방제도정비(8,부목군현)
*태조실록,속육전,원육전,동국사략(권근)
혼일강리도(동양최고세계지도)
 


오답 해설>
① 과전을 혁파하고 직전을 설치한 것은 세조 12년인 1466년의 일이다(직전법). 직전법에서는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② 최무선(1325~1395)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둔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③ 어영청을 중심으로 북벌을 추진한 것은 조선 효종 대(재위 1649-1659, 제17대)의 일이다. 어영청이 설치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⑤ 궁중 음악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을 편찬한 것은 성종 24년인 1493년의 일이다.

정답> ②
'김종직의 자는 계온이고 호는 점필재이며, 김숙자의 아들로 선산 사람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효행이 있고 문장이 고결하여 당시 유학자의 으뜸으로 추앙받았는데, 후학들에게 학문을 장려하여 많은 사람이 학문을 성취하였다. 후학 중에 김굉필과 정여창 같은 이는 도학으로 명성이 있었고, 김일손, 유호인 등은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그 밖에도 명성을 얻은 이가 매우 많았다. 연산군 때 유자광, 이극돈 등이 주도한 (가)이/가 일어났을 당시 김종직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화가 그의 무덤까지 미치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종직', '김일손', '유자광', '이극돈' 등의 인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주어진 자료 속 '(가)'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발생한 '무오사화'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무오사화는 김종직(1431~1492)이 작성한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있어났다.
오답 해설>
① 계유정난이 일어난 것은 단종 원년인 1453년의 일이다. 수양
대군이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③ (중종에게) 반정 공신의 위훈(僞勳) 삭제를 주장한 이는 정암
조광조(1482~1519)이다(1519, 중종 14). 기묘사화의 배경이 되었
다고 볼 수 있다.
④ (대윤인) 윤임 일파가 제거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을사사화
때의 일이다(1545, 명종 원년).
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는 계기가 된 것은 선조 24년
(1591)에 발생한 세자 책봉 문제(건저의 문제) 때문이다. 서인(송
강 정철이 영수)에 대한 논죄 여부를 두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
파인 남인으로 나뉘었다.

<사화정리>

오사화 연산1498 의제문, 사초문제
자사화 연산1504 씨폐출사건
중종반정
묘사화 중종1519 훈삭제,모반음모의모락-조광조Kill
사사화 명종1545 위계승문제
정미사화 1547 윤원형 VS 윤원로형제권력다툼(괴벽서사건)
신임사화 1721 영조즉위전 노론4대신 처형(소론득세)

정답> ②
위의 자료에 '각 지역 출신 가운데 서울에 살며 벼슬하는 자들의 모임을 경재소라고 합니다. 경재소에서는 고향에 사는 유력자 중 에서 강직하고 명석한 자들을 선택하여 (가)에 두고 향리의 범법행위를 규찰하고 풍속을 유지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아래의 자료에는 '(가)을/를 설치하고 향임을 둔 것은 맡은 바를 중시 여긴 것이다. 수령은 임기가 정해져 있어 늘 바뀌니, 백성의 일에 뜻을 둔다 하여도 먼 곳까지 상세히 살필 겨를이 없다.
그러므로 각 지역에서 충성스럽고 부지런한 사람을 뽑아 그 지역의 기강을 맡도록 하여 수령의 눈과 귀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가)'는 유향소(향청)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유향소에서는 좌수(유향소의 장)와 별감(유향소의 차석)을 선발하여 운영하였다.
오답 해설>
① (풍기 군수) 주세붕(1495~1554)이 처음 설립한 기구는 서원이다[백운동 서원. 1543(조선 중종 38)].
③ 중앙에서 교수와 훈도를 (교관으로) 파견한 기구는 지방의 향교이다.
④ 대성전을 세워 성현에 제사를 지낸 기구는 문묘(文廟)로,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항교에 설치되었다.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 즉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⑤ 흥선 대원군(1820~1898)에 의해 대부분 철폐된 기구는 서원이다(1864, 고종 원년). 600여 곳의 서원을 47개소를 제외하고 모두 철폐하였다.

 

정답> ①
'(가)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올려 주세요'라는 요청에 대해, '세조
때 축조하였으며,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이 탑의 각 면에는 부처, 보살, 천인상 등이 새겨져 있습니
다', '이 탑 근처에 살던 박지원, 이덕무 등이 서로 교류하여 이
들을 백탑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라는 세 답이 제시되어 있
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문화유산은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임을 알 수 있다(1467, 세조 13).
오답 해설>
②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다(639, 무왕 40). 주어진 이미지는 2018년 6월에 복원된 것이다.
③ 통일 신라 시대에 조성된 경주 불국사 다보탑이다(751, 경덕왕 10).
④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다(7세기).
⑤ 발해의 영광탑이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조선족자치현 서북쪽 탑산에 위치해 있다. 8~10세기에 건립된 발해 시대의 누각식 전탑(모전 석탑)으로 창바이 영광탑 또는 발해 전탑으로도 불린다.
1908년 장펑타이라는 청의 관리가 이 탑에 대해 공자 사당의 영광전(靈光殿)처럼 오랜 세월 속에서도 의연하게 남아 있다고 평`한 뒤로 영광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답> ⑤
'이 비각에는 홍명구 충렬비와 유림 대첩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
습니다. 홍명구와 유림은 이 전쟁 당시 남한산성에 피란해 있던
국왕을 구하기 위해 근왕병을 이끌고 김화에서 적을 크게 물리쳤
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남한산성에 피란해 있던 국왕'이
라는 표현에서 밑줄 그은 '이 전쟁'은 병자호란임을 알 수 있다
[1636.12(인조 14)~1637.1(인조 15)].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바로 병자호란 때의 일이
다.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였던 김준룡(1586~1642)은 근왕병을
이끌고 적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던 중 용인 광교산
에서 항전하였다. 이때 김준룡은 청의 장수 공경(孔耿)의 부대와
싸워 청 태조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를 포함한 많은 적을 사
살하였다.
오답 해설>
① 훈련도감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8월의 일이다.
②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된 것은 병인양요 때의 일이다
(1866.10).
③ (홍의 장군) 곽재우(1552~1617)가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일
으킨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의 일이다.
④ 강홍립이 이끄는 부대가 참전한 것은 사르후 전투*이다
(1619.3, 광해군 11).
* 사르후 전투 : 조·명 연합군이 후금[청]의 군대가 만주의 사르
후에서 맞서 싸운 전투로 조·명 연합군이 대패하였다. 이후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된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정답> ②
(가)에 '임금이 전교하기를, 내 생각에는 허적이 혹시 허견의 모반
사실을 알지 못했는가 하였는데, 문안(文案)*을 보니 준기를 산속 정
자에 숨긴 사실이 지금 비로소 드러났으니, 알고서도 엄호한 정황이
분명하여 감출 수가 없었다. 그저께 허적에게 사약을 내려 죽인 것
도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묵재 허적
(1610~1680)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주어진
자료는 경신환국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1680, 숙종 6).
*문안: 문서나 문장의 초안
(나)에는 '임금이 명하기를, 국운이 평안하고 태평함을 회복하여 중
전이 복위하였으니,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하는
도리이다. 장씨에게 내렸던 왕후의 지위를 거두고, 옛 작호인 희빈
을 내려 주도록 하라. 다만 세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것은 폐하지
말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중전이 복위하고 '장씨'에게
희빈을 다시 내려 준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주어진 자료는 갑술
환국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1694, 숙종 20).
송시열이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된 것은 기사환국 때의 일이다
(1689, 숙종 15).
오답 해설>
① 양재역 벽서 사건이 발생한 것은 명종 2년인 1547년의 일이다.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소윤) 세력이 경기도 과
천의 양재역에 붙여진 벽서를 빌미로 을사사화(1545) 이후 잔존한
반대파 인물들(대윤 세력과 사림계)을 재차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
화라고도 한다. 후일 소윤 일파 몰락 후 벽서 사건 자체가 무고임이
공인되었다.
③ 자의 대비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된 것은 두 차례이다[1차 예
송(기해예송)-1659(현종 즉위년)/2차 예송(갑인예송)-1674(현종
15)].
④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난 것은 선조 22년인
1589년의 일이다. 1591년까지 정여립과 연루된 다수의 동인이 희생
되었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계
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⑤ 붕당의 폐해를 막기 위해 탕평비가 (성균관 앞 반수교 옆에) 세
워진 것은 영조 18년인 1742년의 일이다.

 

정답> ①
한국사 쟁점 토론의 주제로 '공납의 개혁, 어떻게 볼 것인가'가 제시되어 있다. 왼쪽 말풍선에 '방납의 폐단으로 농민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공물을 현물 대신 쌀, 베 등으로 납부하는 이 법이 시행되면 농민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는 농민의 말[주장]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하지만 이 법이 시행되면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공물을 납부하게 되어 토지가 많은 지주들의 부담은 크게 늘어납니다'는 양반 지주의 말[반박]이 나와 있다. '방납의 폐단'으로 백성들의 공납 부담이 커져 '공물을 현물 대신 쌀, 베 등으로 납부하는 법'은 곧 17세기에 전국에 걸쳐 순차적으로 시행된 대동법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608(광해군 즉위년)~1708(숙종 34), 공납의 전세화, 공납의 전결화].
대동법의 시행으로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하였다.
오답 해설>
② 어염세, 선박세 등이 국가 재정으로 귀속된 것은 균역법 시행
때문이다(1750, 영조 26).
③ 전세를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차등 과세[연분9등법]한 것은
공법 시행 시이다(1444, 세종 26).
④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가 시행된 것은 고종 8년
인 1871년의 일이다.
⑤ 제정을 보충하기 위해 지주에게 결작[1결당 쌀 2두]이 부과된
것은 균역법 시행 때문이다.

 

* 조세제도의 변천

1. 당나라때 확립된 조(토지),(노동력),(토산현물)

2.

고구려(경무법-밭이랑),백제(두락제-파종량)신라(결두제-생산량)

고려-태조(1/10),조선(영정법-양척동일법)

3. -조선(균역법) 4. -조선(대동법-1결당12)

정답> ④
'조선의 법전'이라는 제목 아래 속대전과 대전통편이 차례로 제


시되어 있다. 이어 속대전은 '(가) 때 경국대전을 개정 및 증보하
여 편찬한 법전으로, 경국대전의 규정이 그대로 유지된 것은 싣
지 않고, 기존 규정이 변경되거나 신설된 조목만을 수록하였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속대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한 것
은 조선 영조 22년인 1746년의 일이다. 또 대전통편은 '(나) 때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그 뒤의 법령을 통합하여 편찬한 법전으

, 경국대전의 내용에 원(原), 속대전의 내용에 속(續), 새로 추
가된 내용에 증(增)을 붙여 구분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
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재정비한) 대전통편이 편찬된 것은 조선
정조 9년인 1785년의 일이다.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조선 정조 17년인
1793년의 일이다.



















3  




 


 


 



권농






 


 
X
 
 
 


오답 해설>
① 청과의 국경[경계]을 정한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숙종 38년인 1712년의 일이다.
②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한 것은 고종 대의
일이다(고종 2년인 1865년에서 고종 5년인 1868년까지).
③ 이종무(1360~1425)를 파견하여 대마도를 정벌한 것은 조선
세종 원년인 1419년의 일이다. 우리나라가 대마도를 정벌한 것은
여러 번으로, 이종무에 의한 것과 고려 창왕 원년인 1389년 박위
(?~1398)에 의한 것이 대표적이다.
⑤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파견한 것은 효종 대의 일이다[효종
5년인 1654년(변급), 효종 9년인 1658년(신류)].

정답> ⑤
'이 책은 (가)이/가 학문과 사물의 이치를 논한 글과 제자들의 질
문에 응답한 내용을 모아 엮은 성호사설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은/는 노비 제도의 개혁, 서얼 차별 폐지 등 다
양한 개혁안을 제사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가)'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
(1681~1763)임을 알 수 있다.
이익은 곽우록에서 토지 매매를 제한하는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중농학파 vs 중상학파

  중농학파(유이정)   중상학파(유홍박박)


유반균 [반계수록][균전제]
병농일치()사농일치(교육)
한계:적서차별,내적서차별
문음제도,노비제도인정
유수원 [우서]-중국과비교
농업의전문화와 상업화로 농업생산력증대
대상인의 지역사회개발참여
이익 이익따지는-차가워-화폐X
[성호사설][한전제] 6좀론:노비,과거,양반,기교,승려,게으름[붕당론]화폐폐단지적
홍대용 임하룡의 신지군
[임하경륜][의산문답]
균전제주장,신분제철폐
주자학극복-부국강병요체
김석문지전설(의산문답)이익,정약용,김석문,홍대용


[여유당전서]-500
3부작
-목민심서(지방관의도리)
-경세유포(중앙정치,정전제)
-흠흠신서(형옥관리)
3논설
-탕론(왕교체가능설)
-원목(정치근본,목민관)
-전론(여전제,공동)
*정치개혁론-향촌단위방위
*기예론-북학파와같은주장
박지원 박지원 한화 선수
[열하일기]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한전론]
화폐유통,수레-선박이용,
양반문벌제도모순지적
박제가 제가 소비
[북학의]-4,
규장각검서관,청과통상강화,
수레-배이용 늘릴 것
절약보단 소비(우물)
박세당 [색경]-농가집성비판
윤휴와함께[사변록]지어성리학비판사문난적으로몰림
   
홍만선 [산림경제]    
서유구 [임원경제지][종저보]
 


오답 해설>
① 이벽(1754~1785) 등과 교류하며 천주교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인물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둘째 형인 정약전(1758~1816)
과 셋째 형인 정약종(1760~1801)을 들 수 있다.
② (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한 인물
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1852, 철종 3).
③ 동호문답에서 수취 제도의 개혁 등을 제안한 인물은 율곡 이
이(1536~1584)이다(1569. 선조 2). 참고로 이이는 그외 성학집
요, 만언봉사, 격몽요결 등을 저술하였다.
④ 가례집람을 지어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한 인물은
서인의 영수이자 예학의 대가였던 사계 김장생(1548~1631)이다
[1685(숙종 11)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