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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알기쉽게 정리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55회 심화 문제와 해설 정리 (1) + 신박한 암기법

정답>

'공주 석장리 유적' 검색 결과 '주먹도끼, 찍개 등 () 시대의 대표적 유물이 한반도 남부에서 최초로 출토된 곳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또한 집자리 유적도 발굴되어 () 시대에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는 구석기(시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구석기 시대에 사람들은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 거주하였다.

* 구석기시대 유적지의 특징 : 뗀석기

1.단양상시리금굴유적- 最古의 구석기 유적지

2.공주석장리- 구석기시대존재가 확정됨(전기~후기)

3.연천전곡기- 주먹도끼, 찍개 다나옴

4.종성동관진- 1933년 최초발견, 한반도 구석기처음확인

5.구석기용도

사냥용 주먹도끼, 슴베찌르개, 찍개, 찌르개, 팔매돌
요리용 긁개, 밀개, 자르개,
공구용 새기개

6.중석기유적지- 통영상노대도(조개더미),거창임불리유적

(잔석기) 홍천군 하화계리유적

7.주거- 동굴+막집

8.사회- 무리사회

오답 해설>

명도전, 반량전 등의 화폐가 유통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반달 돌칼을 이용하여 곡식을 수확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 동검을 만든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한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정답>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 집에서 맞이하여 장성할 때까지 기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여자가 장성하면 여자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자 집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 집에서 돈을 지불한 후 다시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초기 국가, 옥저의 민며느리제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에는 '읍마다 우두머리가 있어 세력이 강대하면 신지라 하고, ······ 그 다음은 읍차라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나라에는 철이 생산되는데 예(), () 등이 와서 사간다. 무역에서 철을 화폐로 사용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초기 국가, 삼한, 그중에서도 변한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초기 국가, 옥저와 동예에서는 읍군(邑君), 삼로(三老)라 불린 우두머리[군장]가 읍락을 다스렸다.


*부족장(마가,우가,저가,구가)가신(대사,사자,대사자)
-5부족연맹,4출도지배,연맹국가
4대금법
형사취수
흰옷숭상
순장,112
-금와전설
-뇌옥(감옥)
-중국과친선
(고구려)
고구려 5(소계절관순)
大加가신(사자,조의,선인)
수상(상가,대로,패자)관리
예서제(서옥제)
=데릴사위제
동맹,112
*형사취수제
감옥X
절약과침략
옥저 X 거수,,읍군,삼로
*지리적이유로 중국문화수입을 하지 못하여 군장국가까지만 머무름
예부제
=민며느리제
가족묘,세골장
두벌묻기쌀항아리
오곡,맥포
해산물풍부
동예 책화,방직기술
무천(10)
단궁,반어피
과하마
삼한 제정분리(신구문화갈등완충지)
종교(천군-소도)
정치(신지,읍차,부례)
제천행사(5,10)
두레,상투,문신
벼농사

오답 해설>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한 나라는 (옥저가 아니라) 삼한이다.

여러 가()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한 나라는 (삼한이 아니라) 초기 국가, 부여이다.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유명한 나라는 (삼한이 아니라) 초기 국가, 동예이다.

한 무제가 파견한 군대의 공격으로 멸망한 나라는 고조선이다(기원전 108).

정답>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 아래 주제로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찾아서'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경로로, '환도산성 국내성 오회분 5호묘 광개토 대왕릉비 장군총'이 나와 있다.

관구검(?~255)이 이끄는 위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한 것은 동천왕 18년인 244년의 일이다. 이때 고구려의 환도()성이 함락되었다.

오답 해설>

고구려가 첫 번째 도읍으로 삼은 곳은 압록강 중류의 졸본이다(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 유리왕 22년인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매지권(買地權)이 새겨진 지석과 석수가 출토된 것은 백제 무령왕릉이다.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대가야를 정복하고 순수한 후 세운 것은 창녕비이다. 진흥왕 22년인 561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정식 명칭은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이다. 진흥왕 순수비 4개 중의 하나이다(나머지는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장군총은 돌무지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통일 이전 신라의 무덤 양식이다.

정답>

()'고구려 병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죽어서 [문주가] 왕위에 올랐다. ······ 겨울 10,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 20)의 백제 한성 공격으로 개로왕(재위 455-475, 21)이 전사하고 문주왕(재위 475-477, 22)이 웅진(지금의 충남 공주)으로 천도한 사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475, 문주왕 원년).

() '왕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는데, 신라 복병을 만나 그들과 싸우다가 살해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백제 성왕(재위 523-554, 26)이 신라를 공격하다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사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554, 성왕 32).

지방을 통제하기 위하여 22담로에 왕족이 파견된 것은 백제 무령왕 대(재위 501-523, 25)의 일이다.

오답 해설>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된 것은 무왕 대(재위 600-641, 30)의 일이다(630년대 추정).

(달솔) 흑치상지(630?~689)가 임존성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6607월 백제 멸망 직후부터이다. 흑치상지는 도읍인 사비성 함락 직후 임존성(오늘날 충남 예산 대흥)을 거점으로 하여 3만 명의 병력을 수습하고, 당군을 격퇴하면서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통해 (백제에) 불교가 수용된 것은 침류왕(재위 384-385, 15) 원년인 384년의 일이다.

계백(?~660)이 이끄는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맞서 싸운 것은 6607월의 일이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대아찬으로 승진하셨다고 들었습니다'는 말이 나와 있다(대아찬은 제5등 관계).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고맙네. 하지만 6두품인 자네는 이 제도 떄문에 아찬에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네 그려'라는 대답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제도'는 신라의 독특한 폐쇄적 신분제인 골품제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골품제는 집과 수레의 크기 등 일상생활까지 규제하였다(법흥왕 때 정비).

오답 해설>

원화(源花)에 기원을 두고 있는 제도는 신라의 화랑도이다(576, 진흥왕 37). 삼국사기에 처음에 남모와 준정이라는 여자 둘을 뽑았으나 둘 사이의 갈등으로 원화 제도가 폐지된 기록이 있다. 화랑도를 국선도(國仙徒풍월도(風月徒원화도(源花徒풍류도(風流徒)라고도 불렀다.

을파소(?~203)의 건의로 처음 마련된 제도는 고구려의 진대법이다(197, 고국천왕 16).

서얼의 관직 진출을 법으로 제한한 제도는 서얼 금고법이다. 경국대전에서 법제화되었다(1485, 성종 16). 이후 철종 2년인 1851년에 신해허통이 이루어져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법적 규제는 철폐되었다.

문무 5품 이상 관리(와 공신)의 자손을 대상으로 한 것은 고려의 음서 제도이다.

정답>

'검모잠이 남은 백성들을 거두어 신라로 향하였다. 안승을 맞아들여 임금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다식(多式) 등을 신라로 보내어 고하기를, 지금 신 등이 나라의 귀족 안승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원컨대 변방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신라 왕은 그들을 금마저에 정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구려 부흥 운동을 벌이던 검모잠(?~670)이 안승을 임금으로 삼고, 당의 군사를 몰아내기 위해 신라와 협조하는 내용으로, 670년의 일이다(당의 정벌대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안승에게 피살). 연표에서는 660년과 676년 사이인 () 시기에 해당한다. 참고로 금마저는 지금의 전북 익산으로 4년 뒤인 674년에 (고구려 유민을 위한) 보덕국이 설치되었다.

 

*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과 나당전쟁

멸망 부흥 식민관청 나당전쟁 소마매기
백제
660
,
수신
치상치
5도독부(웅진도독)
소부리주
소부리주마진적성매소성기벌포신라승리(당군이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이전)삼국통일
한계-1.영토축소(~)
2.외세개입
의의-1.첫통일,
2.당축출(자주성),
3.국가경제력향상

668

모잠
연무
연수
9도독부
(안동도호-설인귀)
신라
676
  계림도독부(문무왕)

*당과동맹(648)X(660)계림도독부,웅진도독부설치(663)고구려X(668)안동도호부설치(669)나당전쟁(671)매소성쌈(675)기벌포해전(676)

 

 

정답>

왼쪽 말풍선에 '오늘 소개해 주실 문화유산은 무엇입니까?'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이것은 ()5경 중 하나인 동경 용원부 유적에서 발견된 불상입니다. 보탑(寶塔) 안의 다보불이 설법하던 석가불을 불러 함께 나한히 앉았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형상화하였습니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발해의 이불병좌상으로, 이를 통해 주어진 '()'는 발해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신라도를 통하여 신라와 교류하였다. 발해에는 5개의 주요 대외 교통로가 있었는데, 당과는 조공도·영주도가, 거란과는 거란도가, 일본과는 일본도가, 신라와는 신라도가 있었다.

오답 해설>

왜에 칠지도를 만들어 보낸 국가는 백제이다. 백제의 제14대 왕인 근구수왕(재위 375-384)이 왕자로 있을 때 일본 사신을 통해 왜왕에게 보냈다[372(근초고왕 27), 일본서기].

(중앙군으로) 26위의 군사 조직을 운영한 국가는 고려이다.

광평성 등의 정치 기구를 마련한 국가는 후고구려이다(904).

95소경의 지방 행정 제도를 갖춘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685, 신문왕 5).

정답>

'다큐멘터리 공모 신청서'라는 제목 아래 공모 분야로 '인물 탐사 다큐멘터리'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작품명으로 '()의 저서, 위대한 역사 기록이 되다', 기획 의도로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실상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을 남긴 승려가 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의 기록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재조명한다'가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기존에 간과해 왔던 이슬람 세계와 비잔틴 제국에 대한 기록까지도 현지 답사를 통해 고증하고자 한다'는 차별화 전략과 주요 촬영국으로 '중국, 인도, 이란,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는 구법 순례기인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신라의 고승, 혜초(704~787)임을 알 수 있다(727, 성덕왕 26).

오답 해설>

향가 모음집인 삼대목이 편찬된 것은 진성 여왕 2년인 888년의 일이다.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화랑도의 규범으로 세속 5계를 제시한 인물은 원광(555~638)이다(601, 진평왕 23).

무애가를 지어 불교 대중화에 힘쓴 인물은 화쟁국사 원효(617~686)이다.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화엄 사상을 정리한 인물은 원묘국사 의상(625~702)임을 알 수 있다(668, 문무왕 8).

정답>

 밑줄 그은 '이 시기'(통일) 신라 말기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 것은 신라 헌덕왕 14년인 822년의 일이다[헌덕왕(재위 809-826, 41].

체징(804~880)9산 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을 개창한 것은 신라 문성왕 2년인 840년의 일이다[문성왕(재위 839-857), 46].

오답 해설>

왕의 장인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킨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의 일이다.

거칠부(502~579)가 왕명에 의해 국사를 편찬한 것은 진흥왕 6년인 545년의 일이다.

김춘추(604~661)가 진골 출신 최초로 왕위에 오른 것은 661년의 일이다[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29].

자장(590~658)의 건의로 황룡사 9층 목탑이 건립된 것은 선덕 여왕 15년인 646년의 일이다(643년에 건의).

정답>

'창작 뮤지컬, 삼태사, 후삼국 통일의 길을 열다'는 제목 아래 '고창 전투에서 ()/를 도와 견훤에 맞서 싸운 공로로 태사(太師)의 칭호를 받은 김선평·장길(장정필권행, 그리고 후삼국 통일을 염원했던 백성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뮤지컬로 선보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는 고려 태조인 왕건(재위 918-943)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고창(지금의 경북 안동) 전투가 벌어진 것은 930].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한 것은 936(태조 19)의 일이다.

오답 해설>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게 한 인물은 견훤(867~936)이다(927).

국자감에 7재라는 전문 강좌를 개설한 것은 고려 예종 4년인 1109년의 일이다.

마진이라는 국호와 무태라는 연호를 사용한 인물은 궁예(?~918)이다(904).

후주와 사신을 교환하여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한 인물은 광종(재위 949-975, 4)이다(951, 광종 2).

정답>

()'왕규가 광주원군을 옹립하려고 도모하였다. 왕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무리로 하여금 침실에 잠입시켜 왕을 해하려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왕규의 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려 혜종 2년인 945년에 일어난 일이다.

()에는 '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경전에 통하고 전적(典籍)을 널리 읽은 자들을 선발하여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로 삼아, 12목에 각각 1명씩 파견하여 돈독하게 가르치고 꺠우치게 하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12목에 1명씩 파견한 것은 고려 성종 6년인 987년의 일이다.

()에는 '왕이 한림학사 쌍기를 지공거로 임명하고, ((()과 시무책을 시험하여 진사르 뽑게 하였다. 위봉루에 친히 나가 급제자를 발표하여, 갑과에 최섬 등 2, 명경에 3, 복업에 2명을 합격시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에서 과거제가 처음 실시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광종 9년인 958년의 일이다.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된다.

정답>

'이것은 태안 마도 3호선에서 출수된 죽찰*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당시 ()의 수도인 강화에 있던 김준에게 보내는 물품 내역이 적혀 있습니다. 김준은 교정별감이 되어 국정을 장악했던 인물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죽찰 내용으로는 '김 영공(김준)의 댁에 홍합젓갈 등을 올림'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는 고려임을 알 수 있다(무신 정권기).

*죽찰(竹札):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자를 기록하던 대나무 조각. 또는 대나무 조각을 엮어서 만든 책

고려 숙종 대에 해동통보, 활구 등의 화폐가 발행되었다[1102(숙종 7)/1101(숙종 6)].

오답 해설>

동시전을 설치하여 시장을 감독한 국가는 신라이다(509, 지증왕 10).

감자, 고구마 등이 구황 작물로 재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전개된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계해약조를 맺어 일본과의 무역을 규정한 것은 조선 세종 25년인 1443년의 일이다. 계해약조는 조선이 쓰시마 도주와 맺은 세견선 등 무역에 관한 조약으로, 1426(세종 8)에 있었던 3포의 개항을 비롯한 무역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정식으로 맺은 조약이다

 

정답>

()'왕이 서경에서 안북부까지 나아가 머물렀는데, 거란의 소손녕이 봉산군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더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서희를 보내 화의를 요청하니 침공을 중지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 있었던 고려 성종 12(993)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에는 '강감찬이 수도에 성곽이 없다 하여 나성을 쌓을 것을 요청하니 왕이 그 건의를 따라 왕가도에게 명령하여 축조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강감찬(948~1031)의 건의로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여 개경 방어를 강화한 것은 고려 현종 대의 일이다[1009(현종 즉위년)~1029(현종 20)].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재위 997-1009, 7)을 폐위시킨 것은 1009년의 일이다(강조의 정변). 거란의 제2차 침입의 빌미가 되었다.

10~
11C
거란 광군사 1차서희(강동6) 2차양규 3차강감찬(귀주)
침입영향 : 나성축조, 천리장성, 7대실록편찬(현종),초조대장경조판, 고송거의세력균형
 

오답 해설>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된 것은 고려 고종 12년인 1225년의 일이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이 설치되어 화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나세, 심덕부 등이 진포에서 왜구를 물리친 것은 진포 대첩[해전]이다(1380, 우왕 6).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난을 일으킨 것은 고려 명종 6년인 1176년의 일이다(공주 명학소의 난, 또는 망이·망소이의 난).

정답>

  이분희(?~ 1278), '변발', '왕은 입조하였을 때에 이미 변발하였지만'에서 주어진 자료는 원 간섭기 초기인 충렬왕 대(재위 1274-1308, 25) 초에 해당함을 짐작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충렬왕 즉위년인 127410, 충렬왕이 몽골에서 오는 제국대장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서북면까지 직접 갈 때 있었던 일이다.

유인우, 이인임 등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것은 공민왕 5년인 1356년의 일이다.




 
!


 

 
 


성총
관부
회복


일소

행성
폐지
민변

도감
거제

정비
녕부
다시
공격



 


 

오답 해설>

만적이 개경에서 반란을 모의한 것은 고려 신종 원년인 1198년의 일이다.

왕실의 외척인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한 것은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17) 초기이다(1122~1126).

최충(984~1068)9재 학당을 설립하여 유학을 교육한 것은 고려 문종 9년인 1055년의 일이다.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 교정도감이 (집권자인 최충헌에 의해) 설치된 것은 고려 희종 5년인 1209년의 일이다.

정답>

맨왼쪽 말풍선에 '서경 천도와 금국 정벌을 주장하며 일어났어'라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연호를 천개로 하는 대위국이 선포되었어'라는 말이 나와 있다.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신채호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평가하였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대화에 나타난 사건은 묘청(?~1135)의 서경 천도 운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135, 고려 인종 13).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다른 말로 묘청의 난은 김부식 등이 이끈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오답 해설>

국왕이 나주까지 피란가게 된 사건은 거란의 제2차 침입 시의 일이다(1011, 현종 2).

초조대장경 간행의 계기가 된 사건은 거란의 침입 때문이다[1011(현종 2)~1087(선종 4)]. 고려 최초의 대장경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였으나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소실되었다(1232, 고종 19).

이성계(1335~1408)가 정권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온 사건은 위화도 회군이다(1388, 우왕 14).

여진 정벌을 위해 별무반이 편성된 것은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의 일이다.

정답>

 

단군부터 충렬왕까지의 역사서를 서사시로 서술한 역사서는 제왕운기이다(1287, 충렬왕 13).

오답 해설>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를 수록한 역사서는 삼국유사이다(1285, 고려 충렬왕 11).

사초,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실록청에서 편찬한 역사서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기전체 형식으로 구성한 역사서는 삼국사기이다(1145, 인종 23).

강목체로 고려 왕조의 역사를 정리한 역사서는 본조편년강목이다(1316, 충숙왕 4). 고려 후기의 문신 민지(1248~1326)의 저술로, 줄여서 '편년강목'이라고도 한다. 해동고승전은 왕명에 의해 각훈(?~?)이 고승들의 전기를 기록한 역사서이다(1215, 고종 2).

 
 

정답>

'이 불상은 천연 암벽을 이용하여 몸체를 만들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올렸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 , 입 등을 크게 만들어 거대한 느낌을 주며 조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불상 측면에는 세조의 비 정희 왕후와 성종의 안녕을 기원하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보물(93)이고 경기도 파주시에 소재한다는 내용도 나와 있는 바 이를 통해 ()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마애불은 둥근 갓을 쓰고 왼손을 어깨높이로,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연꽃 줄기를 붙잡고 있다(미륵으로 추정). 오른쪽의 마애불에서는 네모난 갓을 쓰고 합장하고 있다. 옷자락의 흐름이 바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답 해설>

경주 팔공산의 관봉 석조여래 좌상이다. 통일 신라의 불상으로, 머리 위에 갓 모양의 모자가 얹혀 있어 이른바 '갓바위 불상'이라고도 불린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 입상으로,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11세기경 제작 추정). 불두(佛頭)를 따라 제작하여 불신(佛身)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한 형식이다.

논산 관촉사 석조[은진] 미륵보살 입상이다. 불상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고려 광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다고 인정받아 2018년에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 입상이다. 고려 시대의 불상으로, 보물 제96호이다. 모두 5매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고 1매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 모양의 눈썹, 긴 행인형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거불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정답>

 공법(貢法)을 윤허하였다는 부분을 통해 밑줄 그은 ''은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재위 1418-1450)임을 알 수 있다(1444, 세종 26).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소개한 농사직설이 편찬된 것은 세종 11년인 1429년의 일이다.

 

세종 *집현전(경연),훈민정음,활자제조,불교정책,6조직계제X
*토지,세제개혁(수등이척법 69), 의창, 노비지위
*형벌제도정리[금부삼복법], 역법개정(칠정산내외편)
*측우기,자격루,혼천의, 아악정리(박연)
*(46) (쓰시마정벌-이종무), 삼포개항
*농사직설, 의방유취,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고려사
팔도지리지, 육전등록, 효행록, 사시찬요,
한글용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 토지제도와 조세법(측량법)

답험
손실법
수등
이척법
  공법X   직전
X
명종
양척동일법
(효종1653)
과전법 공법 직전법 관수관급제 녹봉제
태조 세종 세조 성종 영정법1635

*수조권폐지-전주전호제약화, *소유권-지주제강화, 지주전호제

*과전법-관리의직접수조 ,현직 1대원칙 계구수전

*직전법-현직관리자에만, 토지소유권자극

*관수관급제-국가가대신(국가토지지배권강화)관리수조권약화

모든토지에 적용된것은아님

*손실답헙법1410-국가파견관리가수확량을답사후 과세결정, 공정X

*공법(세종1430)-수년간수확고를 평균, 답험손실법과 병행

 

오답 해설>

음악 이론 등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이 완성된 것은 성종 24년인 1493년의 일이다.

민간의 광산 개발을 허용하는 설점수세제가 시행된 것은 효종 2년인 1651년의 일이다.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는 직전법이 제정된 것은 세조 12년인 1466년의 일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의서를 망라한 동의보감이 (내의원에서) 간행된 것은 광해군 5년인 1613년의 일이다. 참고로 허준(1539~1615)이 동의보감 집필을 끝낸 것이 1610년이다. 동의보감은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답>

  주어진 자료 속 왕은 조선의 제11대 왕인 중종(재위 1506-1544)임을 알 수 있다.

신진 인사를 등용하기 위한 현량과를 실시한 것은 중종 14년인 1519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조총 부대를 나선 정벌에 파견한 왕은 효종(재위 1649-1659, 17대이다[두 차례, 1654(변급 통솔)/1658(신류 통솔)].

46진을 설치하여 북방 영토를 개척한 왕은 세종(재위 1418-1450, 4)이다[4(1433, 세종 15)/6(1434, 세종 16)]. 4군은 최윤덕(1376~1445), 6진은 김종서(1383~1453)에 의해 개척하였는데, 완성하기까지 대략 10여 년이 걸렸다.

단종 복위 운동을 계기로 집현전이 폐지된 것은 세조 2년인 1456년의 일이다.

국가의 의례를 정비한 국조오례의가 편찬된 것은 성종 5년인 1474년의 일이다.

 

정답>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난 것은 선조 22년인 1589년의 일이다. 1591년까지 정여립과 연루된 다수의 동인이 희생되었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오답 해설>

이시애가 길주를 근거지로 난을 일으킨 것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의 일이다.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이언적 등이 화를 입은 것은 명종 2년인 1547년의 일이다.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소윤) 세력이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 붙여진 벽서를 빌미로 을사사화(1545) 이후 잔존한 반대파 인물들(대윤 세력과 사림계)을 재차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라고도 한다. 후일 소윤 일파 몰락 후 벽서 사건 자체가 무고임이 공인되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은 단종 원년인 1453년의 일이다(계유정난).

이조 전랑 임명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은 선조 8년인 1575년의 일이다.

 
 

정답>

  주어진 '()'는 규장각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은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초계문신제를 주관하였다(1781, 정조 5).

오답 해설>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화된 기구는 비변사이다(1555, 명종 10).

은대(銀臺), 후원(喉院)이라고도 불린 기구는 왕명의 출납을 맡은 비서 기관인 승정원이다.

5품 이하 관리 임명에 서경권을 행사한 기구는 사헌부와 사간원이다.

대사성을 중심으로 좨주, 직강 등의 관직을 둔 기구는 성균관이다.

정답>

 말풍선 속 '()'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선조 26) 8월에 설치된 훈련도감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훈련도감은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오답 해설>

수원 화성에 외영을 둔 것은 조선 정조 17년인 1793년의 일이다. 당시 장용영은 도성 안에 본영을, 수원 화성에 외영을 두었다.

용호군과 함께 궁성을 호위한 군대는 응양군이다(고려의 중앙군인 2).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창설된 군대는 어영청이다(1624, 인조 2).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군사 훈련을 받은 군대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다(1881, 고종 18).

 
 

정답>

  주어진 자료는 임진왜란 초기 신립(1546~1592)이 충북 충주 탄금대에서 패배한 일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1592.4.26-28).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이 동래성 전투에서 항전한 것은 1592(선조 25) 415일의 일이다(같은 해 413일 임진왜란 발생).

오답 해설>

김시민(1554~1592)이 진주성에서 항쟁한 것은 1592106일의 일(~10)이다(1차 진주성 전투). 참고로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이듬해인 15936월에 있었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것은 1593(선조 26) 16일의 일이다.

이순신(1545~1598)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승리한 것은 159278일의 일이다(한산도 대첩).

권율(1537~1599)이 행주산성에서 크게 승리한 것은 1593212일의 일이다(행주 대첩).

 

정답>

'이것은 이 왕이 농경을 장려하기 위해 세손과 더불어 친경(親耕)과 친참(親蠶)을 거행하고 그 기쁨을 표현한 경잠기의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균역법을 제정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여주는 등 민생 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왕'은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재위 1724-1776)임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재위 18년인 1742년에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한 탕평비를 건립하였다(성균관 앞 반수교 옆).

3
대유폐

 


 


 



권농

비공감법 평책
 


 
X
 
 
 

오답 해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한 왕은 성종(재위 1469-1494, 9)이다(1485, 성종 16).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한 신해통공을 실시한 왕은 정조(재위 1776-1800, 22)이다(1791, 정조 15).

전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을 제정한 왕은 인조(재위 1623-1649, 16)이다(1635, 인조 13).

각 궁방과 중앙 관서의 공노비 6만여 명을 해방한 왕은 순조(재위 1800-1834, 23)이다(1801, 순조 원년).

 

정답>

  주어진 자료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북한산비를 진흥왕 순수비 중의 하나로 고증한 사실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1852, 철종 3). 출처인 완당집(阮堂集) 역시 김정희의 시문집이다['완당'이 김정희의 여러 호() 중의 하나].

김정희는 역대 명필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창안하였다.

오답 해설>

담헌서를 통해 과거제 폐지를 주장한 인물은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

북학의를 저술하여 수레와 배의 이용을 권장한 인물은 초정 박제가(1750~1805)이다(1778, 정조 2).

연려실기술에서 조선의 역사를 기사 본말체로 서술한 인물은 완산 이긍익(1736~1806)이다(1776, 영조 52). 백과사전식으로 구성된 기사 본말체 사서이자 일종의 정치 야사집이다.

주역을 바탕으로 수론(數論)을 전개한 구수략(九數略)을 저술한 인물은 명곡 최석정(1646~1715)이다(1700, 숙종 26). 최석정은 영의정까지 역임한 문신으로, 구수략은 말 그대로 수학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