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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알기쉽게 정리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54회 심화 문제와 해설 정리 (1) + 암기법 포함

 

정답>

'김포 신안리 집터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 등 출토'라는 제목 아래 '경기도 김포시 신안리 유적 발굴 조사에서 총 23기의 집터가 확인되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집터 내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 갈돌, 갈판 등의 유물을 통해 정착 생활과 농경이 시작된 () 시대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신석기' (시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뽑은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와 특징 : 간석기

1.신석기- 전기: 이른민무늬토기(원시무문토기)

중기: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 기하문토기)

V자형, 회색 사토질토기

후기: U자형토기, 황해도 봉산지탑리에서 탄화된 조,,수수가 출토농경시작

2.신석기유적지- 서울암사동, 부산동삼동, 황해도지탑리

3.돌가래, 돌보습, 돌낫 농기구

4.가락바퀴(방주차), 뼈바늘(골침)직조문화

오답 해설>

명도전을 사용하여 중국과 교류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이다.

의례 도구로 청동 방울 등을 사용한 것은 청동기 시대이다.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 동검을 제작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이다(비파형 동검이라면 청동기 시대에 해당).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고인돌을 축조한 것은 청동기 시대이다.

 
 

정답>

'대군장이 없고 관직으로는 후·읍군·삼로가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무천),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이라 한다. ······ 낙랑의 단궁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고 무늬 있는 표범이 많다. 과하마가 있으며 바다에서는 반어가 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가 가리키는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임을 알 수 있다.

동예에는 읍락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다.

 

* 초기국가들의 생활상


*부족장(마가,우가,저가,구가)가신(대사,사자,대사자)
-5부족연맹,4출도지배,연맹국가
4대금법
형사취수
흰옷숭상
순장,112
-금와전설
-뇌옥(감옥)
-중국과친선
(고구려)
고구려 5(소계절관순)
大加가신(사자,조의,선인)
수상(상가,대로,패자)관리
예서제(서옥제)
=데릴사위제
동맹,112
*형사취수제
감옥X
절약과침략
옥저 X 거수,,읍군,삼로
*지리적이유로 중국문화수입을 하지 못하여 군장국가까지만 머무름
예부제
=민며느리제
가족묘,세골장
두벌묻기쌀항아리
오곡,맥포
해산물풍부
동예 책화,방직기술
무천(10)
단궁,반어피
과하마
삼한 제정분리(신구문화갈등완충지)
종교(천군-소도)
정치(신지,읍차,부례)
제천행사(5,10)
두레,상투,문신
벼농사

*하호(농민)-고려시대 백정과 같은 일반농민,

부유한호민-하호-노비

*왕권버금세력-고구려(고추가),백제(길사)신라(갈문왕)

*갈문왕-왕의 근친에게주던 봉작으로 통신때 사라짐

오답 해설>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한 나라는 삼한이다.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옥저이다.

제가 회의에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한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여러 가()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정답>

'() 체험 축제'라는 제목 아래 '이진아시왕*이 고령 일대에 세운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축제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주요 프로그램으로 '금동관 모형 제작하기', '투구와 갑옷 착용하기', '지산동 고분군 야간 트레킹'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한 '대가야'임을 알 수 있다.

*이진아시왕: 대가야국의 시조(기원후 42년경). 별칭으로 내진주지, 뇌질주일이라고도 한다.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형이다.

400년 신라를 구원하러 온 고구려군의 공격에 의해 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하던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화되고 이후부터 대가야가 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하게 되었다. 즉 가야 연맹의 중심지가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이동하게 된다.

 

* 가야연맹

1.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2. 5C초 고구려 낙동강진출과 신라의 압박금관대가야

3. 고대국가발전못하고 백신의 정치군사적 압박으로 멸망

4. 철생산, 중계무역

5. 가야토기일본 스에키토기 가스

6. 초기12가야6가야연맹체

7. 멸망-본가야(법흥와532), 대가야(진흥왕562)

오답 해설>

범금 8조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는 고조선이다.

임신서기석과 관련된 나라는 신라이다. 명문의 임신년(壬申年)552(진흥왕 13) 또는 612(진평왕 34) 중 어느 한 해일 것으로 판단된다.

6688월 나당 동맹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지역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9도호부 42100현으로 나눠지고, 당의 장수 설인귀가 도호부사로 임명됨).

22담로에 왕족이 파견된 나라는 백제이다(6세기 초인 무령왕 대).

 

정답>

'이것은 국보 제242호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로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한 이 왕 때 건립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비석에는 신라 6부의 성격과 관등 체계, 지방 통치 조직과 촌락 구조 등 당시 사회상을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왕'은 신라의 제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세워진 것은 법흥왕 11년인 524년의 일이다.

이차돈(506~527)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한 것은 신라 법흥왕 14년인 527년의 일이다(*528년 공인설 있음).

 

증왕 6 순장x, 신라,, 우산국정복, 동시전, 지순신왕우동
법흥왕 6 관제정비(병부상대등), 공복제정, 불교공인,
율령제정, 건원(연호), 532 본가야(금관)정복
흥왕 67 가야정복, 룡사, 강유역확보(신주설치),
(거칠부),열홀주설치(함흥,순수비), 주설치
랑제도화, 당항성확보 진흥대황한국비품화
7 건복(연호), 원광법사(걸사표),
위화부 승부 조부 예부 영객부 설치
7 친당,황룡사9,첨성대축조,비담의반란진압,의자왕공격-고구려왜당help(김춘추)
7 품주분리(집사부+창부),당의연호사용,좌이방부,태평송(당에바침),聖骨,나당동맹

오답 해설>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한 것은 지증왕 12년인 512년의 일이다.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한 것은 신문왕 대의 일이다[687(신문왕 7)/689(신문왕 9)].

인재 등용을 위해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것은 원성왕 4년인 788년의 일이다.

거칠부(502~579)에게 명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한 것은 진흥왕 6년인 545년의 일이다.

정답>

'이 국가의 고분 벽화는 도읍이었던 지안과 평양 일대에 주로 남아 있는데, 일상생활과 풍속, 신앙과 의례를 묘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국가'는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선지 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아니라 고려 말의 문신인 박익(1332~1398)의 묘에 있는 벽화의 일부이다(밀양 박익 벽화묘, 1420년에 축조). 고려 말과 조선 초 여성들의 의복과 장신구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지금까지 고구려 고분은 90여 개가 발견되었다.

오답 해설>

(평남 강서에 있는) 수산리 고분 벽화이다.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리에 소재하며,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인물 풍속화가 널방의 동서남북 네 벽에 그려져 있다. 제시된 그림은 서쪽 벽으로 가운데 띠를 두고 위와 아래에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위쪽 그림으로, 주인 부부가 시종들을 데리고 곡예를 구경하는 모습이다. 수산리 고분 벽화는 일본 나라 지방의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영향을 주었다.

무용총 접객도이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소재하며, 널방(묘실)의 북쪽 벽에 그려져 있다. 신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다르게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각저총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무용총에는 접객도 외에 무용도, 수렵도도 있는데 역동적이고 활달한 화풍을 가진 가장 고구려적인 벽화로 평가받고 있다.

 

정답>

()'잔치를 크게 열어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왕과 []정방 및 여러 장수들은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당하(堂下)에 앉혔다. 때로 의자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는 모두 목이 메어 울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직후의 상황을 나타내는 사료임을 알 수 있다(660.7, 태종 무열왕 7).

()에는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으나 잇달아 패배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시득은] 다시 진군하여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나당 전쟁의 사실상의 마지막 전투인 기벌포 전투[해전]와 관련된 사료임을 알 수 있다(676.11, 신라 문무왕 16).

안승(?~?)이 신라에 의해 보덕왕으로 임명된 것은 674(문무왕 14)의 일이다.

*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과 나당전쟁

멸망 부흥 식민관청 나당전쟁 소마매기
백제
660
,
수신
치상치
5도독부(웅진도독)
소부리주
소부리주마진적성매소성기벌포신라승리(당군이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이전)삼국통일
한계-1.영토축소(~)
2.외세개입
의의-1.첫통일,
2.당축출(자주성),
3.국가경제력향상

668

모잠
연무
연수
9도독부
(안동도호-설인귀)
신라
676
  계림도독부(문무왕)

*당과동맹(648)X(660)계림도독부,웅진도독부설치(663)고구려X(668)안동도호부설치(669)나당전쟁(671)매소성쌈(675)기벌포해전(676)

오답 해설>

(고구려의) 고국원왕(재위 331-371, 16)이 평양성에서 전사한 것은 371년의 일이다.

성왕(재위 523-554, 26)이 관산성 전투에서 피살된 것은 554년의 일이다.

김춘추(604~661)가 당과의 군사 동맹을 성사시킨 것은 648년의 일이다(나당 동맹 체결).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물리친 것은 612년의 일이다(살수 대첩).

 

정답>

왼쪽 말풍선에 '오늘 소개해 주실 자료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이것은 일본의 이시야마사에 소장된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해동성국이라 불린 ()의 사신 이거정이 가져간 것으로, 당시 양국의 교류와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발해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선왕 대(재위 818-830)에 이르러 51562주의 지방 행정 제도를 갖추었다.

* 발해사 연구

1. 698 대조영돈화건국 ~ 926 거란에 멸망

2. 발해에 관한 기록 : 제발해 조아동동

구당서(발해말갈전),신당서(발해전)
이승휴 제왕운기 최초 발해사 연구, 서사시로 구성
유득공 발해고 신라발해南北國주장,발해사만다룬최초사서
한치윤 해동역사 발해를 고,,,고려와같은 비중으로다룸
신채호 조선상고사 발해, 신라 양국시대론
정약용 아방강역고 발해사를 우리민족사로 다룸
안정복 동사강목 삼국사기를 읽고 北國이 발해임을 밝혀냄
이종휘 동사 단군-기자-삼한-후조선본기와 따로 <세가>편을 서술하여면서 발해세가를 기자-부여-가야세가와 더불어 입전시킴

3. 36(당관제모방,독자성 )

정당성(대내상)-6(()충인의()지예신),선조성,중대성

4.주자감(국립대)

5.중정대(감찰기관)-통신(사정부),고려(어사대),(사헌부)

6.지방제도-51562

7.발해가 우리민족이 세운나라라는 증거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당과신라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국가로 인식

발해기록역사서

말갈족은 우리민족의 한 분파

당적요소 고구려적요소
36/주작대로/1562/10
관등제/동경성축조/잠자는미녀상/공주묘(벽돌무덤)
5경제/궁전지의온돌장치/천장의모줄임구조/사원지의불상양식/와당의연화문/석등/발해성터/발해음악/공주묘(굴식돌방)

오답 해설>

광군을 창설하여 외침에 대비한 국가는 고려이다(947, 정조 2).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운영한 국가는 (통일)신라이다[687(신문왕 7)/685(신문왕 5)].

광덕, 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고려이다(고려 광종 대).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을 파견한 국가는 신라이다(673, 문무왕 13).

정답>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붉은색 바지를 입어 모습을 다르게 하였기 때문에 적고적(赤袴賊)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주와 현을 도륙하고,. 수도의 서부 모량리까지 와서 민가를 노략질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신라 말에 발생한 적고적의 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896, 진성 여왕 10).

()에는 '훙천주 도독 헌창은 그의 아버지 주원이 임금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세워 경운 원년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신라 헌덕왕 대에 발생한 김헌창의 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822, 헌덕왕 14).

()에는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 장군의 군사를 빌려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명이 왕위를 빼앗아[희강왕 축출] 신라의 제44대 왕인 민애왕(재위 838-839, 44)이 된 것은 838년의 일이다.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된다.

 

정답>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 아래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찾아서'가 주제로 나와 있다. 이어 제1일차에는 '() 송산리 고분군, () 공산성'(이상 충남 공주), 2일차에는 '()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 능산리 고분군'(이상 충남 부여), 3일차에는 '() 미륵사지'(이상 전북 익산)가 제시되어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금제 사리봉영기가 발견되었다.

오답 해설>

백제 금동 대향로가 출토된 곳은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 사이이다.

온조왕(재위 기원전 18-기원후 27)이 왕성으로 삼은 곳은 하남 위례성으로, 오늘날 서울의 풍납토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재상을 선출하던 천정대가 있었던 곳은 충남 부여 규암면 호암리이다. 천정대와 호암사지에서 백제의 귀족 회의인 정사암 회의가 열렸다.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 즉 무령왕릉이 발굴된 것은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이다.

정답>

위의 자료에 '()/는 왕의 족제(族弟)인 김부에게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후에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사로잡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여기서 김부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6, 56)이다. 후백제의 견훤(867~936)927년 신라 경주에 쳐들어와 경애왕을 죽인 뒤 김부를 왕위에 올린 사건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자료에는 '()/는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특히 아끼어 왕위를 전하려 하니, [금강의] 형 신검, 양검, 용검 등이 이를 알고 몹시 근심하고 번민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후백제에서 왕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금산사(전북 김제 소재)에 유폐되기 직전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935).

견훤은 남중국의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고 검교태보의 직을 받았다.

 

오답 해설>

사림원을 설치하여 개혁을 실시한 인물은 고려의 충선왕(재위 1298/1308-1313, 26)이다(1298, 충선왕 즉위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한 인물은 후고구려의 궁예(?~918)이다(905).

김흠돌을 비롯한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한 인물은 신라의 신문왕(재위 681-692, 31)이다(681, 신문왕 원년).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한 인물은 고려의 태조(재위 918-943)이다(936, 태조 19).

 

정답>

'왕이,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은 각자 봉사를 올려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라라고 명령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최승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 이제 앞선 5대 조정의 정치와 교화에 대해서 잘되고 잘못된 행적들을 기록하고, 거울로 삼거나 경계할 만한 것들을 삼가 조목별로 아뢰겠습니다. ······ 신이 또 시무(時務) 28조를 기록하여 장계와 함께 따로 봉하여 올립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최승로(927~989)가 고려 성종(재위 981-997, 6)에게 올린 시무 28조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982, 성종 원년).

고려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다(983, 성종 2).



 
 
 
 
문신월과법

 
 
 
 
평창
 
 
 



 
 
서원
 
 
 



 
 


 
 
 
직개편
 
 
교주의
 
 
앙관제
 
 
권농정책
 
노비환천법 방관파견
12
자감
 
 
 

오답 해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흑창을 처음 설치한 왕은 고려 태조(재위 918-943)이다(918, 태조 원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한 왕은 고려 광종(재위 949-975, 4)이다(956, 광종 7).

청연각과 보문각을 두어 학문 연구를 장려한 왕은 고려 예종(재위 1105-1122, 16)이다(1116, 예종 11).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운영한 (대표적인) 왕은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31)이다(1366, 공민왕 15).

정답>

'이곳은 오연총 장군을 모신 덕산사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원래 함경도 경성에 있던 사당을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으로 옮겨 왔습니다. 그는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편성된 ()의 부원수로 활약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고려의 별무반임을 알 수 있다(1104, 고려 숙종 9).

별무반은 고려 예종 2년인 1107년에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오답 해설>

46진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은 조선 세종 대의 일이다(1433~1443/1434~1449).

원의 요청으로 일본 원정에 참여한 것은 고려 충렬왕 대의 일이다[1274(충렬왕 즉위년)/1281(충렬왕 7)].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한 것은 몽골의 제2차 침입 시의 일이다(1232, 고려 고종 19).

최씨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 역할을 한 부대는 삼별초이다(1232~1273).

 

 

정답>

왼쪽 말풍선에 '이번에 왕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이 책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뒤, 우리나라의 역사를 좀 더 잘 알아야 한다는 폐하의 말씀에 따라 유교 사관을 바탕으로 삼국의 역사를 충실히 기록하였습니다'는 대답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역사서'는 김부식(1075~1151) 주도로 편찬된 삼국사기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본기, 열전 등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오답 해설>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역사서는 영재 유득공(1748~1807)의 발해고이다(1784, 조선 정조 8).

사초,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편찬된 역사서는 조선 왕조 실록이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를 수록한 역사서는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이다(1285, 충렬왕 11).

고구려 건국 시조의 일대기를 서사시로 표현한 역사서는 이규보(1168~1241)의 동명왕편이다(1193, 명종 23).

 

 

정답>

'이곳은 ()/가 불교계 개혁 운동을 전개한 순천 송광사입니다. 그는 수행 방법으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사진 속에는 '보조국사 감로탑''국사전'이 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불일보조국사 지눌(1158~1210)임을 알 수 있다.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을 작성하여 정혜쌍수를 강조하였다(1190, 고려 명종 20).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에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을 것을 결의하였다. 먼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수행자들이 갖기 쉬운 의문을 제시하고 그에 답한 다음, 정혜결사를 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오답 해설>

(왕명에 의해) 승려들의 전기를 담은 해동고승전을 집필한 인물은 각훈(?~?)이다(1215, 고종 2).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화엄 사상을 정리한 인물은 신라의 고승, 의상이다(668, 문무왕 8).

불교 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교장을 편찬한 인물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다(고려 선종 3년인 1086년에 교장도감 설치). 흔히 속장경이라 일컬어지는 불교 경전 주석서가 바로 교장(敎藏)이다.

보현십원가를 지어 불교 교리를 대중에게 전파한 인물은 균여(923~973)이다(광종 대인 963년과 967년 사이에 지음).

정답>

'국외 소재 우리 문화유산을 찾기 위해 헌신한 박병선 박사(1928~2011)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예정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녀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간행된 ()/를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직지심체요절임을 알 수 있다(1377, 우왕 3).

직지심체요절은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답 해설>

군주의 도를 도식으로 설명한 것은 퇴계 이황(1501~1570)의 성학십도이다(1568, 선조 원년).

세금 수취를 위해 3년마다 작성된 것은 신라 촌락 문서이다. 지금의 충북 청주 부근인 서원경의 4개 촌을 대상으로 작성된 신라 촌락 문서는 노동력 동원과 세금 징수를 위해 작성되었다. 작성된 시기로는 755년설(경덕왕 14), 816년설(헌덕왕 8), 876년설(헌강왕 6) 등 여러 설이 있다..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제작된 것은 초조대장경이다. 고려 현종 2년인 1011년에 발원하여 선종 4년인 1087년에 최종 완성되었다. 고려 최초의 대장경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였으나 몽골의 제2차 침입 때(1232) 소실되고 말았다.

충신, 효자, 열녀를 알리기 위해 간행된 것은 삼강행실도이다(1434, 조선 세종 16).

 
 

정답>

()'다루가치*가 왕을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선지(宣旨)라 칭하고, ()이라 칭하고, ()라 칭하니 어찌 이렇게 참람합니까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에 선지를 왕지(王旨), 짐을 고(), 사를 유(), ()를 정()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몽골의 간섭으로 관제는 물론 칭호까지 격하된 사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충렬왕 원년인 1275년에 있었던 일이다.

*다루가치: 몽골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감찰관[통치관]

()에는 '왕이 시해당하자 태후가 종실에서 [후사를] 골라 세우고자 하니, 시중 이인임(?~1388)이 백관을 거느리고 우왕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공민왕(재위 1351-1374, 31)이 피살되고 우왕(재위 1374-1388, 32)이 즉위한 1374년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유인우(?~1364), 이자춘(1315~1360)* 등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것은 고려 공민왕 5년인 1356년의 일이다.

*이자춘: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아버지(부친)

오답 해설>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포를 제작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정중부(1106~1179) 등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은 고려 의종 24년인 1170년의 일이다(무신 정변).

최우(?~1249)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장기 항전을 준비한 것은 고려 고종 19년인 1232년의 일이다.

명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 정벌이 추진된 것은 고려 우왕 14년인 1388년의 일이다(위화도 회군 발생).

 

정답>

'왕이 말하였다. 장영실(1390년경~?)은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총명하고 뛰어나 자격루를 만들었다. 이것은 만대에 이어 전할 만한 기물로 그 공이 작지 아니하니 호군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황희가, 장영실에게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은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재위 1418-1450)임을 알 수 있다.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정리한 농사직설이 편찬된 것은 세종 11년인 1429년의 일이다. 정초, 변효문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으며, 관찬(官撰)으로 간행되었다.

오답 해설>

주자소가 설치되어 계미자가 주조된 것은 태종 대의 일이다(1403, 태종 3).

훈련[무예] 교범인 무예도보통지가 간행된 것은 정조 대의 일이다(1790, 정조 14). 규장각 검서관인 이덕무와 박제가가 장용영 소속 장교 백동수 등과 함께 편찬하였다.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설치된 것은 선조 대의 일이다(1593, 선조 26).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포수, 살수, 사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으며, 대부분 급료를 지급받는 직업 군인으로 구성되어 상비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전통 한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이 완성된 것은 광해군 대의 일이다(1610, 광해군 2). 허준(1539~1615)이 집필하였으며,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내의원에서 이를 출간하였다.

 

 

정답>

'()에 대해 알려 줄래?'라는 질문에, '대제학, 부제학 등의 관직을 두었어', '궁중의 서적과 문서를 관리하였어', '옥당, 옥서 등의 별칭이 있었어'라는 대답이 차례로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조선의 홍문관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홍문관은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3사로 불렸다. 참고로 홍문관은 성종 9년인 1478년에 새롭게 설치되었다.

오답 해설>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맡아보았던 조선의 기구는 한성부이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화된 것은 비변사이다(1555, 명종 10).

왕의 비서 기관으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기구는 승정원이다.

국왕 직속 사법 기구로 반역죄, 강상죄 등을 처결한 것은 의금부이다

 

 

정답>

'이곳은 경기도 수원시에 위치한 조선 시대 지방 교육 기관인 ()엡니다. 대부분 지방 관아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으며 제향 공간인 대성전, 강학 공간인 명륜당,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조선의 향교임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향교에) 교수나 훈도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오답 해설>

전문 강좌인 7재를 운영한 교육 기관은 고려의 국자감이다(1109, 고려 예종 4).

풍기 군수 주세붕(1495~1554)이 처음 세운 교육 기관은 조선의 서원이다[백운동 서원. 1543(조선 중종 38)].

생원과 진사에게 입학 자격을 부여한 교육 기관은 조선의 성균관이다.

유학을 비롯하여 율학, 서학, 산학을 교육한 교육 기관은 고려의 국자감이다.

정답>

()'항과 봉은 정씨의 소생이다. 왕은 어머니 윤씨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 정씨의 참소 때문이라 여기고, 밤에 엄씨, 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왕은 대비에게 어찌하여 내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하며 불손한 말을 많이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선의 제10대 왕인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성종의 후궁이던 엄씨와 정씨를 장살하고, 인수 대비에게 불손하게 대한 사실을 기록한 내용으로 1504(연산군 10)에 있었던 일이다.

()에는 '이덕응이 진술하였다. 윤임과는 항상 대윤, 소윤이라는 말 때문에 화가 미칠까 우려하여 서로 경계하였을 뿐이었고, 모략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윤임이 신에게 주상이 전혀 소생할 기미가 없으니 만약 대군이 왕위를 계승하여 윤원로가 뜻을 얻게 되면 우리 집안은 멸족당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선의 제12대 왕인 인종(재위 1544-1545)이 즉위한지 9개월 만에 죽고(1545년 음력 7월에 사망), 명종이 제13대 왕으로 즉위한 1545(명종 즉위년)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신진 인사를 등용하기 위해 현량과가 시행된 것은 중종 14년인 1519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허적과 윤휴 등 남인이 대거 축출된 것은 경신환국 때의 일이다(1680, 숙종 6).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난 것은 선조 22년인 1589년의 일이다.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김일손 등이 처형된 것은 무오사화 때의 일이다(1498, 연산군 4).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해 탕평비가 건립된 것은 영조 18년인 1742년의 일이다.

 
 

정답>

'선릉에서 만나는 조선의 예와 악'이라는 제목 아래 '()의 재위 기간에 예악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편찬된 국조오례의와 악학궤범의 의미를 살펴보는 무대를 준비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부 특별 강연으로 '국조오례의를 통해 본 조선의 의례', 2부 주제 공연으로 '악학궤범을 바탕으로 재현한 처용무'가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국조오례의는 조선 성종 5년인 1474년에 편찬되었고, 악학궤범 역시 성종 24년인 1493년에 간행되었으므로, 자료 속 '()'는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재위 1469-1494)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선릉은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 왕후 윤씨의 무덤이다(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에 소재).

조선 세조 때 착수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한 것은 성종 16년인 1485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상평통보를 발행하여 법화로 사용한 것은 숙종 4년인 1678년의 일이다(전국으로 유통되기 시작).

구황촬요를 간행하여 기근에 대비한 것은 명종 9년인 1554년의 일이다.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여 문신들을 재교육한 것은 정조 5년인 1781년의 일이다.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여 역대 문물을 정리한 것은 영조 46년인 1770년의 일이다.

 

 

정답>

'이 자료는 이 전쟁에서 공을 세운 김시민을 선무 2등 공신으로 책봉한 교서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진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왜군의 보급로를 끊었으며 전라도의 곡창 지대를 지키는 데 기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시민(1554~1592)''진주성 전투(1)*'가 나온 것으로 보아 밑줄 그은 '이 전쟁'은 임진왜란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592.4~1598.11, 음력).

*1차 진주성 전투는 159210월에, 2차 진주성 전투는 이듬해인 15936월에 벌어졌다.

(조선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1594~1646)이 백마산성에서 항전한 것은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1636, 인조 14). 백마산성은 평안북도 의주군 백마산에 있던 성이다. 참고로 임경업은 병자호란 이후 명에 망명하여 청을 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조선에 압송되어 옥사하였다.

오답 해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것은 15931월의 일이다(평양성 탈환).

권율(1537~1599)이 행주산성에서 크게 승리한 것은 15932월의 일이다(행주 대첩).

조헌(1544~1592)(충남) 금산에서 의병을 이끌고 활약한 것은 15927~8월의 일이다(금산 전투).

이순신(1545~1598)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승리한 것은 15927월의 일이다(한산도 대첩).

정답>

'겸재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 강산'이라는 제목 아래 '겸재 정선(1676~1756)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그의 그림을 온라인으로 만나 보세요'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 왼쪽에 정선의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한양진경 두 작품[왼쪽부터 차례로. 양화환도(1740, 영조 16)와 압구정(1741, 영조 17)]이 제시되어 있다.

*경교명승첩: 한양 근교와 한강변의 명승명소를 그린 진경 산수화와 인물화로 구성된 정선의 그림첩이다. 33장의 그림 중 20여 점이 한강과 한양 일대를 주제로 삼고 있는데, 정선은 그의 나이 65세가 되던 무렵(1740)부터 이곳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2017년에 보물 제1950호로 지정되었다.

주어진 선지 중 이 정선의 인왕제색도이다. 인왕제색도는 '금강전도'와 함께 정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1751년작, 황혼에 접어든 일흔 여섯의 나이에 완성).

오답 해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영통동구도이다(송도기행첩 중의 한 점)(1757, 영조 33). 산과 바위에서 서양화 기법인 원근법과 명암법(음영법)이 반영되었다.

단원 김홍집(1745~1806)의 송석원시사야연도이다(1791, 정조 15). 말 그대로 송석원의 시회(詩會)를 묘사한 그림이다.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 대군(1418~1453)이 꿈에서 본 이상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이다(1447, 세종 29).

정답>

왼쪽 말풍선에 '국왕께서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면하라는 명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그렇습니다.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입니다. 아울러 감면으로 인한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도 마련하라고 하셨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취해진 조치는 곧 균역법을 가리키며(1750, 영조 26), 밑줄 그은 방책이라는 것도 균역법 실시에 따른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임을 알 수 있다.

일부 부유한 양민에게 선무군관포를 징수한 것은 방책 중의 하나이다. 그외 1결당 쌀 2두의 결작 징수, 해세·어장세·선박세 징수 등이 있다.

오답 해설>

풍흉에 따라 전세를 9등급으로 차등 과세한 것은 공법 중 연분9등법이다(1444, 세종 26).

(국상 을파소의 건의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진대법을 시행한 것은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일이다(194, 고국천왕 16).

수신전, 휼양전 등의 명목으로 세습되는 토지를 폐지한 것은 직전법 시행 때의 일이다(1466, 세조 12).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운영한 것은 고려 광종 대이다(963, 고려 광종 14).

 

24번 오답 해설>

지우재 정수영(1742~1831)이 그린 한강임진강유람사경도권(漢江臨津江遊覽寫景圖卷)*의 일부이다(1796~1797). 이 그림은 길이가 거의 16m에 이른다. 정수영은 1796년 여름에 한강에서 출발하여 이듬해 가을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유람하였는데, 한 번의 여정을 이어 그린 것이 아니라 유람 중에 만난 인상적인 경치 26장면을 때로는 짤막짤막하게 여러 번, 때로는 긴 화면으로 자유롭게 그렸다.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