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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알기쉽게 정리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53회 심화 문제와 해설 정리 (1)

정답> ⑤
'시간을 품은 돌, (가) 시대로의 여행'이라는 제목 아래 초대의 글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 박물관에서는 찍개, 찌르개 등 뗀석기를 처음 사용한 (가) 시대 특별전을 마련하였다. 동아시아에 찍개 문화만 존재했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은 연천 전곡리 출토 주먹도끼도 전시하니 많은 관람 바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시대'는 구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거주하였다.

오답 해설>
①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뽑은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② 반달 돌칼을 사용하여 벼를 수확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③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고인돌을 축조한 것 역시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④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 동검을 제작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 '이 나라에는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했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5월과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풍습*도 있었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천군'과 '소도', 5월과 10월에 제사(계절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는 점에서 밑줄 그은 '이 나라'는 삼한임을 알 수 있다.
삼한에는 신지, 읍차 등의 지배자가 있었다.


*王→부족장(마가,우가,저가,구가)→가신(대사,사자,대사자)
-5부족연맹,4출도지배,연맹국가
4대금법
형사취수
흰옷숭상
순장,1책12법
-금와전설
-뇌옥(감옥)
-중국과친선
(↔고구려)
고구려 5부(소계절관순)
大加→가신(사자,조의,선인)
王→수상(상가,대로,패자)→관리
예서제(서옥제)
=데릴사위제
동맹,1책12법
*형사취수제
감옥X
절약과침략
옥저 王X 거수,후,읍군,삼로
*지리적이유로 중국문화수입을 하지 못하여 군장국가까지만 머무름
예부제
=민며느리제
가족묘,세골장
두벌묻기쌀항아리
오곡,맥포
해산물풍부
동예 책화,방직기술
무천(10월)
단궁,반어피
과하마
삼한 제정분리(신구문화갈등완충지)
종교(천군-소도)
정치(신지,읍차,부례)
제천행사(5,10)
두레,상투,문신
벼농사

오답 해설>
② 혼인 풍습으로 서옥제가 존재한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③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④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12배로 갚게 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와 고구려이다(1책 12법).
⑤ 부족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라는 풍속*이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이다.
*풍속(風俗)이란 옛날부터 그 사회(나라)에 전해 오는 생활 전반에 걸친 습관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또 풍습(風習)이란 풍속과 습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그냥 별도로 구분할 필요없이 풍습과 풍속은 사실상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된다.

정답> ④
(가)에 '온달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라가 한강 이북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 저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단번에 우리 땅을 반드시 되찾겠습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온달(?~590)이 590년(고구려 영양왕 원년)에 영양왕에게 자청하여 신라 진흥왕에 의해 복속된 죽령(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에 있는 고개) 이북의 땅을 회복하겠다며 자청하여 출전한 일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출전한 온달은 아단성(지금의 서울 아차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나)에는 '10월에 백제 왕이 병력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이달 23일에 서거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 제13대)의 공격으로 고구려의 고국원왕(재위 331-371 제16대)이 전사한 일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371).
(다)에는 '9월에 왕이 병력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도읍 한성을 함락하였다. 백제 왕 부여경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 제20대)의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부여경)[재위 455-475, 제21대]이 전사한 일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475).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나)-(다)-(가)'가 된다.

정답> ②
'백제 제25대 왕인 (가)의 무덤 발굴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공주시에서 열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은/는 백가의 난을 평정하고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그의 무덤은 피장자와 축조 연대가 확인된 유일한 백제 왕릉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백제의 제25대 왕인 무령왕(재위 501-523)임을 알 수 있다.
무령왕은 중국 남조의 양(梁)과 교류하였다(양으로부터 영동대장군의 관직을 받음).

무녕왕 6 ㉠중국남조의 양과 교류㉡22담로제실시(왕자,왕족파견)㉢벽돌무덤(지석-현존최고지석, 토지매매권)무남조22

오답 해설>
①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의 왕은 무왕(재위 600-641, 제30대)이다(630년대 추정).
③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한 백제의 왕은 근초고왕(재위 346-375, 제13대)이다(375, 근초고왕 30).
④ (동진의)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수용한 백제의 왕은 침류왕(재위 384-385)이다(384, 침류왕 원년).
⑤ 사비로 천도하고 행정 조직을 제정비한 백제의 왕은 성왕(재위 523-554, 제26대)이다(538, 성왕 16).

정답> ②
(가)에 '고구려 왕이,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만약 이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말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김춘추가, 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왕이 분노하여 그를 가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김춘추(604~661, 이후 태종 무열왕)가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하러 갔다가 거부당한 일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642). 참고로 이때의 고구려 왕은 보장왕(재위 642-668, 제28대)이었지만 김춘추의 제안이 거부당한 것은 당시 쿠데타로 실권을 잡고 있던 연개소문(?~665) 때문이었다.
(나)에는 '관창이,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심히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말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관창이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서 돌려보냈다. 이를 본 신라군이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하니 백제 군사가 대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신라의 좌장군 품일의 아들인 화랑 관창(645~660)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제시된 자료는 신라와 백제의 황산벌 전투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660).
신라가 당과 군사 동맹을 체결한 것은 648년(신라 진덕 여왕 2)의 일이다(나당 동맹).
오답 해설>
① 안승(?~?)이 보덕국 왕으로 임명된 것은 신라 문무왕 14년인 674년의 일이다.
③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왕(성왕)이 피살된 것은 554년의 일이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북 옥천 지역에 위치하였다.
④ 흑치상지(630?~689)가 임존성에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백제 멸망 직후인 660년의 일이다(백제 부흥 운동). 임존성은 지금의 충남 예산 지역에 위치하였다.
⑤ (백제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인) 부여풍(?~?)이 백강에서 왜군과 함께 당군에 맞서 싸운 것은 663년의 일이다(백제 부흥 운동). 백강은 지금의 금강 하구(또는 동진강 하구)로 추정하고 있다.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 '며칠 전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고 하네'라는 말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적고적 말이지? 7년 전에는 원종과 애노가 세금 독촉 때문에 봉기하더니, 요즘 들어 나라에 변란이 자주 일어나 걱정이구만'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상 대화는 통일 신라 말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적고적의 난이 일어난 것은 통일 신라 진성 여왕 10년인 896년의 일이며, 원종과 애노의 난 역시 진성 여왕 3년인 889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궁예(?~918)가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 것은 911년의 일이다(연호는 '수덕만세').
오답 해설>
② 독서삼품과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통일 신라 원성왕 4년인 788년의 일이다.
③ 왕의 장인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의 일이다.
④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제29대)의 즉위 이후 그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참고로 원성왕 대(재위 786-798, 제38대) 이후에 즉위하는 왕들은 원성왕의 후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원성왕의 즉위를 기점으로 무열왕계에서 원성왕계[내물왕계]로 교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⑤ 혜공왕(재위 765-780, 제36대)이 귀족 세력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780년의 일이다. 이후 통일 신라는 155년 동안 20여 명의 왕이 교체되는 등 극심하게 동요하였다.

정답> ④
'이곳은 새롭게 중건된 산둥반도의 적산 법화원입니다. 이 사찰을 창건한 인물에 대해 말해 주세요'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화창에는 '당에 건너가 군인으로 활약했어요',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반란을 일으켰어요', '문성왕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어요'라는 말들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인물'은 해상왕 장보고(?~846)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장보고가 활동한 시기에는 (전남 완도에 설치된)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전개되었다[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오답 해설>
① 활구라고 불리는 은병이 유통된 것은 고려 시대의 일이다(1101, 고려 숙종 6).
②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가 (이암에 의해) 소개된 것은 고려 공민왕 대의 일이다(1372, 공민왕 21). 목화 재배와 양잠 등 중국 화북 지방의 농업을 소개하고 있다.
③ 면화, 고추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경시서의 관리들이 수도[개경]의 시전을 감독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목종 대(재위 997-1009, 제7대)로 추정된다(경시서 자체는 그 이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짐작). 그러다 고려 문종 대(재위 1046-1083, 제11대)에 이르러 경시서의 직제가 확대되었다. 이후 경시서는 조선 초에도 계속 존속되다가 세조 12년(1466)에 관제를 개혁할 때 평시서(平市署)로 개칭되었다.

정답> ④
'우리 연구소에서는 (가)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기 위해 온라인 강좌를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강좌 주제로 '제1강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나타난 역사의식', '제2강 정혜 공주 무덤의 구조로 알 수 있는 고분 양식', '제3강 장문휴의 등주 공격을 통해 본 대외 인식', '제4강 인안, 대흥 연호 사용에 반영된 천하관'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국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ㄴ. 솔빈부의 말이 특산물로 거래되었다. 옳은 설명이다.
ㄹ. 거란도, 영주도 등을 통해 주변국과 교류하였다. 발해의 대외 교통로를 일컫는 것으로, 옳은 설명이다. 참고로 발해에는 5개의 주요 대외 교통로가 있었는데, 당과는 조공도·영주도가, 거란과는 거란도가, 일본과는 일본도가, 신라와는 신라도가 있었다.
오답 해설>
ㄱ. 철전인 건원중보가 발행된 것은 고려 성종 15년인 996년의 일이다.
ㄷ. 지방관을 감찰하고자 외사정을 파견한 것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의 일이다.

정답> ④
'국보로 지정된 이 마애불은 둥근 얼굴 윤곽에 자비로운 인상을 지녀 백제의 미소라고 불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중국을 오가던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교통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은 백제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서산 마애 삼존불, 국보 제84호)임을 알 수 있다(선지 ④). 충남 서산시 운산면의 가야산 절벽에 새겨져 있으며, '서산 마애 석불' 또는 '운산 마애 석불'이라고도 부른다.
오답 해설>
①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 입상이다. 보물 제115호이다.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11세기경 제작 추정), 불두(佛頭)를 따라 제작하여 불신(佛身)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한 형식이다.
②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 불상군이다. 국보 제312호이다. 불단에 사방불을 모시고, 뒤쪽의 병풍바위에는 삼존을 새겼다. 사방불은 방향에 따라 손 모양이 다르며, 삼존은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③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 좌상이다. 국보 제144호이다. 암벽을 불감 형태로 파고 그 안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이다. 네모진 얼굴은 신체에 비해서 유난히 큰 편인데 약간 치켜올린 눈꼬리와 꽉 다문 입 등으로 근엄하고 박력있는 느낌을 준다. 신체 각부의 비례가 부자연스럽고 조각 수법이 딱딱하여 고려 시대의 지방적 석불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이다. 보물 제93호이다. 천연암벽을 적절히 활용하여 불신(佛身)을 표현하였다. 불두(佛頭)는 따로 만들어 얹었다. 왼쪽의 마애불은 둥근 갓을 쓰고 왼손을 어깨높이로,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연꽃 줄기를 붙잡고 있다(미륵으로 추정). 오른쪽의 마애불에서는 네모난 갓을 쓰고 합장하고 있다. 옷자락의 흐름이 바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답> ③
고려 시대 재위 1년에 '연호를 광덕으로 정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재위 3년에 '후주에 토산물을 보내고', 재위 11년에 '백관의 공복을 정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재위 19년에 '혜거와 탄문을 국사와 왕사로 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왕은 고려의 제4대 왕인 광종(재위 949-975)임을 알 수 있다.
광종은 재위 7년인 956년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업적




광덕,준풍(연호)
과거제(쌍기,무과X)
귀법사-화엄종
비안검법 교장려

거제도

위보



신숙청

과외교

법사



복제정





오답 해설>
①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한 것은 고려 성종 대의 일이다(983, 성종 2).
② 주전도감을 설치하여 해동통보를 발행한 것은 고려 숙종 대의 일이다[각 1097(숙종 2)/1102(숙종 7)].
④ (강감찬의 건의로) 거란 침입에 대비하여 개경에 나성을 축조한 것은 고려 목종과 현종 대에 걸친 일이다[1009(목종 12)~1029(현종 20)].
⑤ 국자감에 서적포를 두어 출판을 담당하게 한 것은 고려 숙종 대의 일이다(1101, 숙종 6).

정답> ⑤
'시정(時政)을 논박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규찰과 탄핵 업무를 담당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국초에는 사헌대(司憲臺)라 불렸다. 성종 14년(995)에 (가)(으)로 고쳤으며 [관원으로] 대부, 중승, 시어사, 전중(殿中)시어사, 감찰어사가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기구'는 어사대임을 알 수 있다.
어사대의 소속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을 이루어) 언론권(서경권, 간쟁권, 봉박권)을 행사하였다.
대성제=어사대+낭사 (간쟁,서경권) 대어낭
오답 해설>
① 고려 시대에 국정을 총괄하는 중앙 관서는 중서문하성이다.
② 무신 집권기 최고 권력 기구는 교정도감(敎定都監)이다(1209, 고려 희종 5). 참고로 정중부, 이의민 집권기(각 1170-1179/1183-1196)에는 최고 무신 합좌 기구인 중방(重房)이 사실상의 최고 권력 기구였다.
③ 사간원, 홍문관과 함께 삼사로 불린 기구는 조선의 사헌부이다.
④ 원 간섭기에 도평의사사로 명칭이 바뀐 기구는 (국방 회의 기구인) 도병마사이다(1011, 현종 2).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명칭이 바뀐 것은 충렬왕 5년인 1279년의 일이다.

정답> ②
'이곳에는 이 왕과 그의 왕비인 노국 대장 공주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조선의 종묘에 고려 왕의 신당이 조성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왕은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인 공민왕(재위 1351-1374)임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신돈(?~1371)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운영하였다(1366, 공민왕 15).







!









성총
관부
회복


일소

행성
폐지
민변

도감
거제

정비
녕부
다시
공격

중시



오답 해설>
①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 원의 도읍인 북경에) 만권당을 두어 원의 학자들과 교유한 왕은 충선왕(재위 1298, 1308-1313, 제26대)이다(1314, 충숙왕 원년).
③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한 왕은 광종(재위 949-975, 제4대)이다(958, 광종 9).
④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한 왕은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다(936, 태조 19).
⑤ 최승로(927~989)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정비한 왕은 성종(재위 981-997, 제6대)이다(982, 성종 원년).

정답> ①
'(가) 임금이 강조를 토벌한다는 구실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흥화진을 포위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양규는 도순검사가 되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 (가)이/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흥화진에 보내어 항복하라고 설득하였다. 양규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강조(의 정변)'와 '양규'가 제시된 것으로 보아, 주어진 자료는 거란의 제2차 침입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1010, 고려 현종 원년).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종(재위 945-949)은 재위 2년인 947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을 조직한 바 있다.
오답 해설>
② 윤관(?~1111)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개척한 것은 고려 예종 2년인 1107년의 일이다.
③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④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에 대한) 장기 항전을 준비한 것은 고려 고종 19년인 1232년의 일이다(몽골의 제2차 침입의 빌미가 됨).
⑤ (몽골이 차지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을 수복한 것은 고려 공민왕 5년인 1356년의 일이다.

정답> ①
위의 자료에 '11월에 팔관회가 열렸다. 왕이 신봉루에 들러 모든 관료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다. ······ 송의 상인과 탐라국도 특산물을 바쳤으므로 자리를 내주어 음악을 관람하게 하였는데, 이후 상례(常例)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아래의 자료에 '대식국의 객상(客商) 보나합 등이 와서 ······ 물품을 바쳤다. 관리에게 명하여 객관에서 우대하며 대접하게 하고, 돌아갈 때에는 황금과 명주를 넉넉하게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팔관회', '송의 상인', '대식국'이라는 용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고려 시대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오답 해설>
② 송상이 전국 각지에 송방을 설치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도읍인 경주에) 둔 것은 신라 지증왕 10년인 509년의 일이다.
④ 신라방을 형성하여 중국과 활발히 교역한 것은 통일 신라 시대의 일이다(8~9세기).
⑤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이 폐지된 것은 조선 정조 때의 일이다[금난전권, 1791(정조 15)].

정답> ④
위의 자료에 '명학소의 백성 망이·망소이 등이 무리를 모아서 산행병마사라고 자칭하고는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아래의 자료에 '망이의 고향인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양수탁을 현령으로, 김윤실을 현위로 임명하여 그들을 달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망이·망소이의 난(공주 명학소의 난)이 발생한 것은 고려 명종 6년인 1176년의 일이다. 연표에서는 (라) 시기에 해당한다.

* 고려후기 사회의 동요
1. 무신난(1170)→김보당의난(최초-문인),조위총의난(최대-무인,최충헌)→공주명학소(1176,충순현으로승격, 망이망소이난, 일반농민반란+천민신분해당)→전주관노의난→김사미,효심의난→최충헌집권(1196~1219)→만적의난(1198,최초노비반란,개경)→진주노비의난→신라부흥운동(동경의난)→고구려부흥운동(최광수의난,서경)→백제부흥운동(이연년의난,남양)

정답> ⑤
'이것은 개경 흥왕사 터에서 출토된 대각국사의 묘지명 탁본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여기에는 문종의 넷째 아들인 그가 송에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국청사를 중심으로 천태종을 개창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그'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임을 알 수 있다.
의천은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불교 경전 주석서를 편찬하였다(1086, 선종 3).
오답 해설>
①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주장한 인물은 불일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다.
② 무애가를 지어 불교 대중화에 힘쓴 인물은 신라의 화쟁국사 원효(617~686)이다.
③ 황룡사 구층 목탑의 건립을 건의한 인물은 신라의 대국통, 자장(590~658)이다(643, 선덕 여왕 12). 황룡사 구층 목탑이 실제로 완공된 것은 646년(선덕 여왕 15)의 일이다.
④ 백련사 결사를 통해 불교 정화 운동을 전개한 인물은 원묘국사 요세(1163~1245)이다. 요세는 참회에 바탕을 둔 법화 신앙을 강조하였다.

정답> ③
'우리나라 불교 문화유산'이라는 주제 아래 맨왼쪽 말풍선에 '이 탑은 개성에 있었는데 지금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원의 영향을 받은 다각 다층의 대리석 탑이다'는 말이,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대화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은 국보 제86호인, 개성 경천사지 십층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오답 해설>
① 안동 신세동 칠층 전탑이다(통일 신라, 8세기). 국보 제16호이다.
②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이다(통일 신라, 8세기). 국보 제20호이다.
④ (복구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다(639, 백제 무왕 40). 국보 제11호이다.
⑤ 평창 월정사 8각 9층 석탑이다(고려 전기). 국보 제48-1호이다.

정답> ①
'15세기 조선, 과학을 꽃 피우다'는 제목 아래 기획 의도로 '조선 초,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해 과학 기술 분야에서 노력한 모습을 살펴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구성으로 '1부 태양의 그림자로 시간을 보는 앙부일구', '2부 (가)', '3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신무기, 신기전과 화차'가 제시되어 있다.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거중기를 설계한 것은 정조 13년인 1789년의 일이다.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데 사용하였고, 특히 1794년부터 쌓기 시작한 수원성에 거중기가 동원되었다.
오답 해설>
② 국산 약재와 치료법을 소개한 (의학서인) 향약집성방이 편찬된 것은 세종 15년인 1433년의 일이다.
③ 한양을 기준으로 한 역법서인 칠정산 내편이 편찬된 것은 세종 26년인 1444년의 일이다.
④ 활판 인쇄술의 발달을 가져온 계미자가 주조된 것은 태종 3년(1403)이고, 갑인자가 주조된 것은 세종 16년(1434)의 일이다.
⑤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농법을 소개한 농사직설이 편찬된 것은 세종 11년인 1429년의 일이다.

정답> ③
#3. 궁궐 안에서 '성종이 경연에서 신하들과 토지 제도 개혁을 논의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성종이 의견을 말해 보도록 하라는 명에 김유가 '우리나라의 수신전, 휼양전 등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오히려 일이 없는 자가 앉아서 그 이익을 누린다고 하여 세조께서 과전을 없애고 이 제도를 만드셨습니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제도'는 세조 12년인 1466년에 시행한 직전법임을 알 수 있다.
직전법에서는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토지제도와 조세법(측량법)

답험
손실법
수등
이척법

공법X
직전
법X
명종
양척동일법
(효종1653)
과전법 공법 ` 관수관급제 녹봉제
태조 세종 세조 성종 영정법1635

오답 해설>
① 전지와 시지를 등급에 따라 지급한 토지 제도는 고려의 전시과이다.
②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 부담액을 (미곡 4두로) 고정한 것은 조선의 영정법이다(1635, 인조 13).
④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고 수조권을 폐지한 것은 조선의 녹봉제이다(1556, 명종 11).
⑤ 개국 공신에게 인성, 공로를 기준으로 토지를 지급한 것은 고려의 역분전이다(940, 태조 23).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 '얼마 전 노산군이 이곳 영월에 유배를 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성삼문 등이 주도한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이곳으로 보내졌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상 대화의 배경은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임을 알 수 있다(1456, 세조 2). 여기서 노산군은 곧 단종(재위 1452-1455, 제6대)을 가리킨다.
수양 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1453, 단종 원년).
*계유정난: 후일 세조(재위 1455-1468, 제7대)로 등극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 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오답 해설>
② 자의 대비 복상 문제로 두 차례 예송이 전개되었다[1659(현종 즉위년)-기해예송, 1674(현종 15)-갑인예송]
③ 인물성동이론을 두고 (노론 내에서) 호락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주로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의 일이다.
④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피해를 입은 것은 선조 22년인 1589년의 일이다.
⑤ 인현 왕후가 폐위되고 남인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기사환국 때의 일이다(1689, 숙종 15).

정답> ④
'(가)에 대해 알려 줄래?'라는 질문이 나와 있고, 이어 '조선 전기에 많이 제작된 도자기야', '회색(또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맑게 거른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 유약을 씌워 구운 도자기야'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덜 만들어지게 되었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분청사기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이다.
선지 ④가 분청사기 조화어문 편병이다.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이라고도 한다.
오답 해설>
①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이다(13세기 제작). 국보 제68호이다.
② 백자 청화 매죽문 항아리[호]이다(15세기 제작).
③ 청자 참외형 병이다(12세기 제작).
⑤ 발해의 삼채 향로['도기삼채수족세발향로(陶器三彩獸三足香爐)']이다(발해 도기 중 하나). 만주의 영안시 삼령 3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뚜껑이 있는 세발 달린 향로로, 화려한 다리 장식이나 뚜껑의 투각기법 등이 상당히 뛰어나다. 또한 황유·갈유·녹유 등의 조화가 당삼채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답> ③
왼쪽 그림에 '지난달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신하의 주장에 '알아서 처분할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왕의 대답이 나와 있다. 명의 요청으로 강홍립을 파견하였으나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한 광해군 대의 일임을 알 수 있다(1619, 광해군 11). 오른쪽 그림에는 '항복을 받기 위한 단을 삼전도에 이미 쌓았으니, 내일 황제 폐하 앞에서 의식을 거행할 것이오'라는 말이 나와 있다. 병자호란 결과 조선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삼전도의 굴욕'과 관련된 일임을 알 수 있다(1637, 인조 15).
정봉수(1572~1645)와 이립(?~1627)이 용골산성에서 항쟁한 것은 정묘호란 때의 일이다(1627, 인조 5).
오답 해설>
①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가 동원된 것은 효종 대의 일이다[두 차례, 각 1654(변급 통솔, 효종 5)/1658(신류 통솔, 효종 9)].
② 권율(1537~1599)이 행주산성에서 적군을 격퇴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1593, 선조 26, 행주 대첩).
④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등이 청에 인질로 끌려간 것은 병자호란에서의 패배 때문이다(1637, 인조 15).
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비변사가 처음 (임시 군무 협의 기구로) 설치된 것은 중종 5년인 1510년의 일이다(3포 왜란으로 3포 폐쇄)

정답> ③
'조선의 역대 왕들이 가장 많이 머문 궁궐, (가)'라는 제목이 나와 있다. 이어 지도와 사진으로 '부용정과 부용지(정원과 연못)', '후원 입구', '연경당(접견실)', '인정전(정전)', '돈화문(정문)'이 제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라는 주소도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창덕궁(昌德宮)임을 알 수 있다.
욍실 도서관인 규장각이 설치된 곳은 창덕궁이다(1776, 정조 즉위년).
오답 해설>
① 도성 내 서쪽에 있어 서궐로 불린 궁전은 경희궁이다. 본래는 경덕궁이라 불렀다. 참고로 경복궁은 북궐, 창덕궁과 창경원은 동궐로 불렸다.
②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된 곳은 덕수궁(석조전)이다(1946.3-5).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④ (조선 총독부에 의해) 조선 물산 공진회가 개최된 장소는 경복궁이다(1915.9-10).
⑤ 인목 대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된 장소는 덕수궁(석어당)이다(1613, 광해군 5, 계축옥사).

정답> ②
'가만히 살펴보니, 최근 여자들이 서로 다투어 즐겨하는 것이 오직 패설(稗說)*을 숭상하는 일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패설은 날로 달로 증가하여 그 종류가 이미 엄청나게 되었다. 세책가에서는 패설을 깨끗이 필사하여, 빌려 보는 자가 있으면 그 값을 받아서 이익으로 삼는다. 부녀들은 ······ [패설을] 서로 다투어 빌려다가 온종일 허비하니 음식이나 술을 어떻게 만드는지, 베를 어떻게 짜는지에 대해서도 모르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상황은 조선 후기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출처인 『번안집』은 정조 대에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1720~1799)의 시문집이다.
*패설(稗說):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소설
염포(울산)에 왜관이 열린 것은 조선 전기인 세종 때의 일이다[3포 개항, 1426년`(세종 8), 부산포가 이때 열리고 염포와 제포(창원, 내이포)는 10년 뒤인 1436년(세종 18)에 추가로 개방]. 그런데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3포 왜란'으로 3포가 폐쇄되었고 2년 뒤인 임신약조(1512) 때 제포만 개항(이후 부산포로 이동)하고 염포의 왜관은 폐쇄되고 말았다.
오답 해설>
① 담배는 조선 후기에 널리 재배된 상품 작물이다.
③ 장시에서 탈춤 공연이 벌어진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④ 중인들이 시사(詩社)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물주의 자금으로 광산을 경영하는 덕대가 등장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정답> ④
'이 해사록(海槎錄)은 김세렴이 이 사절단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작성한 책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여기에는 쓰시마, 교토를 거쳐 에도까지 간 여정, 당시 일본의 지형과 풍속, 쇼군을 만난 내용 등이 담겨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사절단'은 통신사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동명 김세렴(1593~1648)이 일본에 통신사로 간 것은 인조 14년인 1636년의 일이다
통신사*는 일본 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문물을 전하였다.
*통신사는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 이루어졌다. 통신사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은 매우 높아서 통신사 일행이 방문한 곳마다 정치가나 관료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무사를 비롯한 문인, 묵객, 서민들까지 통신사들에게 서화, 시문, 글씨 등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를 병풍, 회권(두루마리 그림), 판화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널리 유행되었다. 한편, 통신사들은 국내로 돌아와 일본에서 겪은 견문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답 해설>
① 암행어사의 형태로 비밀리에 파견된 사절단은 조사시찰단이다(1881, 고종 18).
② 해국도지, 영환지략을 국내에 소개한 사절단은 연행사(燕行使)이다(1840년대~1850년대). 즉 연행사란 청의 도읍인 연경(燕京:北京)에 간 사신을 일컫는다. 참고로 명에 보내는 사신을 '조천사(朝天使)'라 하였다.
③ 하정사, 성절사, 천추사 등으로 구분된 사절단은 조선이 명과 청에 보낸 사신들을 일컫는 말이다(즉 ②에서 언급한 '조천사'와 '연행사'를 파견 목적에 따라 구분한 명칭). 하정사(賀正使)는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신년 축하)하러 가던 사신으로 정조사(正朝使)라고도 한다. 동지와 정월이 가까이 있으므로 동지사(冬至使)가 하정사(정조사)를 겸하였다. 또 성절사(聖節使)는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이고, 천추사(天秋使)는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이다.
⑤ 기기국에서 무기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온 사절단은 영선사이다(1881~1882, 고종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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