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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알기쉽게 정리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55회 심화 문제와 해설 정리 (2) + 암기법 포함

정답>

  주어진 자료 속 '()'는 일본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초량 왜관이 설치된 것은 조선 숙종 4년인 1678년의 일이다. 동래 상인인 내상이 왜관 개시를 통해 대일 무역에 종사하였다.

. 조선은 일본 막부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통신사는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총 20(조선 전기 8, 조선 후기 12) 이루어졌다. 통신사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은 매우 높아서 통신사 일행이 방문한 곳마다 정치가나 관료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무사를 비롯한 문인, 묵객, 서민들까지 통신사들에게 서화, 시문, 글씨 등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를 병풍, 회권(두루마리 그림), 판화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널리 유행되었다. 한편, 통신사들은 국내로 돌아와 일본에서 겪은 견문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 한성에 동평관을 두어 무역을 허용한 국가 역시 일본이다. 태종 7년인 1407년에 동평관이 처음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다.

오답 해설>

. 하정사, 성절사, 동지사 등 사절단을 보낸 대상 국가는 중국의 명()과 청()이다. 여기서 하정사(賀正使)는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신년 축하)하러 가던 사신으로 정조사(正朝使)라고도 한다. 동지와 정월이 가까이 있으므로 동지사(冬至使)가 하정사(정조사)를 겸하였다. 또 성절사(聖節使)는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이다. 참고로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설로 천추사(天秋使)도 있다.

 

정답>

  이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은 국보 제55호인 보은 법주사 팔상전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법주사 안에는 석련지(국보 제64)와 쌍사자 석등(국보 제5)이 있다.

오답 해설>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17세기의 건축물이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도 17세기의 건축물이다.

부여 무량사 극락전은 17~18세기의 건축물이다.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인 17세기의 건축물이다.

정답>

왼쪽 대화에서 '서학은 반드시 큰 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를 따르는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처벌하여 주소서'라는 말이 나와 있다. 순조 원년인 1801년에 있었던 신유박해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오른쪽 대화에서 '동학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이니 그 두목인 최제우를 효수하여 본보기로 삼으소서'라는 말이 나와 있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를 혹세무민의 죄를 물어 처형한 것은 고종 원년인 1864년의 일이다.

홍경래 등이 난을 일으켜 정주성을 점령한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의 일이다(홍경래의 난).

오답 해설>

[인조]이 도성을 떠나 (충남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란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이괄의 난).

오페르트(1832~1903)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것은 고종 5년인 18685월의 일이다.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삼레 집회가 개최된 것은 고종 29년인 189211월의 일이다.

이인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 세력이 난을 일으킨 것은 영조 4년인 1728년의 일이다.

 

 

정답>

'경복궁 영건일기는 한성부 주부 원세철이 경복궁 중건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의 상황을 매일 기록한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일기에 광화문 현판이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자였음을 알려주는 '묵질금자(墨質金字)'가 적혀 있어 광화문 현판의 옛 모습을 고증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경복궁을 중건한 시기는 고종 2년인 1865년에서 고종 5년인 1868년까지이다.

. 사창제가 실시된 것은 고종 4년인 1867년의 일이다.

. 원납전이 징수된 것은 고종 2년인 1865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 비변사가 (처음 임시 군무 협의 기구로) 설치된 것은 3포 왜란이 일어난 중종 5(1510)의 일이다. 참고로 고종 2년인 1865년에 비변사가 폐지되었다.

. (왕조의 통치 규범을 재정비한) 대전통편이 편찬된 것은 정조 9년인 1785년의 일이다.

정답>

 밑줄 그인 은 고종 3년인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를 가리키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사건은 병인양요임을 알 수 있다.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하였다(한성근은 문수산성에서 싸워 이김).

오답 해설>

운요호가 강화도와 영종도를 공격한 것은 고종 12년인 18769월의 일이다.

정부가 청군의 출병을 요청하는 계기가 된 사건은 임오군란이다(1882.6).

사태 수습을 위해 박규수가 안핵사로 파견된 사건은 진주[임술] 농민 봉기이다(1862, 철종 13).

흥선 대원군이 톈진으로 압송되는 결과를 가져온 사건은 임오군란이다.

 

 

정답>

  밑줄 그은 '이 사건'은 고종 19년인 1882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임을 알 수 있다.

*호종: 임금의 행차 때에 어가(御駕) 주위에서 임금을 모시는 사람, 또는 그러한 행위

임오군란 결과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고 되고, 여기에 일본 공사관에 경기병이 주둔[상주]하는 항목을 규정하였다.

오답 해설>

전개 과정에서 전주 화약이 체결된 사건은 동학 농민 운동이다(1894.5.8).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된 것은 고종 17년인 188012월의 일이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일어난 사건은 갑신정변이다(1884.12).

홍범 14조를 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제시한 것은 제1차 갑오개혁이다(1895.1).

정답>

왼쪽 말풍선에 '나으리, 지난달부터 영국군이 이 섬에 들어와 병영을 짓고 머무르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영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구실로 조정의 허락도 없이 점령했다고 들었네'라는 대답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상황은 영국이 고종 22년인 18854월에 거문도를 무단으로 점령한 사건(거문도 사건)임을 알 수 있다(~1887.2).

 

연표에서는 () 시기에 해당한다.

정답>

  제2차 갑오개혁임을 알 수 있는 바(1894.12~1895.8) 사회·경제 분야의 개편으로는, (제시된 선지 중에서는, 교육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교육입국 조서 반포를 들 수 있다(1895.2).

 

*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타율, 자율적성격(근대화가시작되는 출발점)

1.강화도(통리기무아문)갑오개혁(군국기무처)광무(교정소)

1
갑오
개혁
(1894)
1차 김홍집내각
군국기무처(온건개화당,국왕간섭X, 초정부적)
정치: 개국기원사용, 8아문, 과거제폐지
사회: 반상신분제도폐지
경제: 재정일원화(탁지아문관장) 은본위제
조세금납화 도량형정비
2
갑오
개혁
2차 김홍집내각 : 홍범14(최초헌법)
정치: 8아문7,지방관제(823,소지역주의채택)
지방관은 행정권만(사법권독립)
군대개혁은 소홀
교육:고종의교육입국조서발표(1895,근대적학제)
신교육실시,한성사범학교설립,외국어학교관제마련
을미
개혁
(1895)
4차 김홍집 친일내각(3차 친러김홍집내각-삼국간섭)
을미군 단종건 태우소
제개편(친위대2,지방-진위대)
발령,두법(광제원,지석영)(개국기원건양)
양력, 편사설치, 학교령 공포
 

오답 해설>

지계가 발급된 것은 광무개혁 때의 일이다(1899~1904).

태양력이 사용된 것은 을미개혁 때의 일이다(1895.8~1896.2).

한성순보가 발행된 것은 1883(고종 20) 10월의 일이다(박문국 설치).

공사 노비법이 폐지된 것은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1894.7~12).

정답>

'환수된 황제지보 특별 전시전'이라는 제목 아래 초대의 글로 '우리 박물관에서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인 () 시기에 사용하였던 국새인 황제지보(皇帝之寶)를 공개합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미국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지난 2014년 문화재청과 미국 당국의 공조로 60여 년 만에 환수된 것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 제국이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된 것은 고종 34년인 189710월의 일이다(1897.10.12). 이로부터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는 19077월까지가 '대한 제국 시기'이다.

간도 관리사가 파견된 것은 1903(고종 40)의 일이다. 정확하게는 19026월 이범윤(1856~1940)을 간도 시찰원이라는 명목으로 파견하였다가 이듬해인 19037월에 (북변)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였다.

오답 해설>

(발성)영화 아리랑이 나운규(1902~1937) 감독에 의해 만들어져 상영된 것은 192610월의 일이다.

육영 공원이 만들어진 것은 1886(고종 23) 9월의 일이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관민들에 의해 불태워진 것은 1866(고종 3) 7월의 일이다.

조사 시찰단이 일본에 파견된 것은 1881(고종 18) 4월의 일이다(~7).

정답>

'항일 의병 운동의 전개'라는 제목 아래 맨왼쪽 말풍선에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최익현, 신돌석 등이 의병을 일으켰어요'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을사의병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05~1906). 이어 가운데 말풍선에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반발하여 유인석, 이소응 등 유생들의 주도하에 일어났어요'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을미의병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895~1896). 마지막으로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어요'라는 말이 나와 있다. 정미의병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07~1908).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된다.

 

정답>

'여기는 양기탁과 함께 ()/를 창간하여 항일 언론 활동을 전개한 베델의 묘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나는 죽지만 ()/는 영원히 살려 한국 동포를 구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말풍선 속 '()19047월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임을 알 수 있다(~1910.8).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 제국신문과 함께) 국채 보상 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1907.4~1908.7).

 

국채보상운동(1907,대구)

-서상, (국채보상기성회조직) -대한매일신보

 

* 신문정리 (독황제 매매만대)

한성순보 1883-84, 박영효등 개화파
박문국,관보성격최초신문,10일주기관보,순한문
한성주보(1886)
독립신문 1896-1899, 서재필, 최초의 근대적일간지
순한글판, 영문판 간행
황성신문 1898-1910, 국한문혼용,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
제국신문 1898-1910, 이종일, 순한글, 부녀자대상
매일신문 순한글일간지
대한매일
신보
1905-1910, 영국인 베델창간,가장선봉!! 양기탁,신채호,박은식베델병사총독부매수(매일신보)
만세보 천도교(천만조선농민손동개), 일진회공격,
대한민보 대한협회국민신보대항
 
 

오답 해설>

최초로 상업 광고를 실은 신문은 한성주보이다(1886).

천도교의 기관지로 발행된 신문은 만세보이다(1906.6).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은 독립신문이다(1896.4).

일장기를 삭제한 손기정 사진을 게재한 신문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이다. 손기정 선수(1912~2002)193889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우승하였을 때 두 신문사가 이를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일장기 말소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답>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한 이후 우리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였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의 이익을 빼앗아 차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지금 저들이 황실을 보전하겠다는 말을 폐하는 과연 믿으십니까?'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지금까지 군주의 지위가 아직 바뀌지 않았고 백성도 아직 죽지 않았으며 각국 공사도 아직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약서가 다행히 폐하의 인준과 참정의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니니, 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역적들이 억지로 만든 헛된 조약에 불과합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9051117일 제2차 한일 협약, 이른바 '을사늑약'이 강요되자 현전직 관리 및 재야에서는 일제히 이에 반대하는 상소 운동이 벌어졌는데, 주어진 자료 속 상소문은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1827~1905)가 올린 것이다.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부임한 것은 19062월의 일이다.

 

* 국권침탈과정 (영용러의협 가영포을)

영일동맹 1902 1차영일동맹
용암포사건 1903  
러일전쟁 1904.2 원인: 러의남하정책,영일동맹,용암포
결과: 포츠머스조약
한일의정서 1904.2 군사시설이용권
한일협정서 1904.8 1차한일협약, 고문정치
화폐정리사업(메가다,재질에따라)
가쓰라-태프트 1905.7 가쓰라태프트조약 미- 한국에대한 일본우월권인정한 조약
영일동맹 1905.8 2차영일동맹
포츠머츠 1905.9 -
을사조약 1905.11 2차한일협약(을사늑약), 통감정치, 외교권박탈
을사오적신 한규석,민영기,민영환
(박제순,권중현,이지용,이근택,이완용)
  정미7조약 1907 한일신협약, 차관정치, 한국군대해산
배경-헤이그특사(이상설,이준,이위종)
-고종퇴위
  기유각서 1909 사법권박탈
  한일합방 1910 주권박탈(총독정치), 경찰권강탈
헌병경찰제도도입
 

오답 해설>

1차 영일 동맹이 체결된 것은 19021월의 일이다.

일본(경인철도합자회사)이 경인선 부설권을 [미국으로부터, 정확하게는 미국인 모스(J.R.Morse)에게서] 인수한 것은 1898(광무 2) 5월의 일이다.

(독일인) 묄렌도르프(1848~1901)가 외교 고문으로 파견된 것은 1882(고종 19) 12월의 일이다.

러시아가 용암포를 점령한 것은 19034월이고, 조차를 요구한 것은 같은 해 7월의 일이다.

 

정답>

  자료에서 제시된 인물은 백암 박은식(1859~1925)임을 알 수 있다.

박은식은 실천적인 유교 정신을 강조하는 유교구신론을 저술한 바 있다(1909.3, '서북학회월보에 게재, 유교의 개량과 혁신 주장).

신채호 [독사신론][조선사연구-묘청의난] 독한신랑
[조선상고사-vs非我]
박은식 [유교구신론-양명학][한국독립지] 은혼식에 피
[한국통사-(역사)(나라)]
정인보 [조선사연구]
문일평 [호암집][한미50년사],근현대사연구치중, 평심
최남선 [조선독립운동사][소년-1908], 조선광문회조직
불함문화론일선동조론(조선과일본민족적근원같다)
안재 [조선상고사] 홍씨감
형필 화재수집 문화재수집전문가
이광수 [민족개조론][민족적경륜]민족주의우파
한용운 [조선독립의서][불교유신론]
 

오답 해설>

진단 학회를 창립하고 진단 학보를 발행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두계 이병도(1896~1989)를 들 수 있다. 이 외 한뫼 이윤재(1888~1943), 일석 이희승(1896~1989), 남창 손진태(1900~?), 도남 조윤제(1904~1976) 등이 진단 학회의 실무를 맡아 보았다(1934.5).

여유당전서를 간행하고 조선학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위당 정인보(1893~1950)와 민세 안재홍(1891~1965)을 들 수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인물은 보재 이상설(1870~1917), 이준(1859~1907), 이위종(1887~?) 3인이다.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 발기인 대회를 개최한 대표적인 인물은 고당 조만식(1883~1950)이다(1920.8).

 

정답>

()'조선에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다', '조선 총독부에 조선 총독을 두고 위임 범위 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고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도록 한다', '통감부 및 그 소속 관서는 당분간 그대로 두고 조선 총독의 직무는 통감이 행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선 총독부 및 소속 관서의 관제가 공포된 것은 1910930일의 일이다(칙령 제354). 그 기능은 같은 해 101일부터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에는 '총독 임용의 범위를 확장하고 경찰 제도를 개정하며, 또한 일반 관리나 교원 등의 복제를 폐지함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고 ······ 조선인의 임용과 대우 등에 관해 더욱 고려하여 ······ 정치·사회상의 대우에서도 내지인과 동일한 취급을 할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바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9193·1 운동을 계기로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온 사이토 마코토(통치 1919.8-1927.12)이 밝힌 '시정 방침'이다(1919.9).

조선 태형령이 시행된 것은 19124월의 일이다(~1920.3). 1910년대 '무단 통치기'에 해당한다.

오답 해설>

(미곡) 강제 공출이 시행된 것은 19446월의 일이다. 참고로 미곡 공출제가 실시된 것은 1940년부터이다. 1939년 말에 조선미곡통제령, 조선미곡배급조정령을 공포하여 조선 쌀의 통제를 제도화하고, 공출 및 배급 제도를 실시하였다. 1941년 미곡년도부터는 수이출 미곡만이 아니라 조선 내 소비에 대해서도 공출하면서 공출제가 본격화되었다.

19397월에 제정된 일제의 국민 징용령이 조선에도 적용된 것은 193910월의 일이다.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된 것은 1924년의 일이다. 이때는 중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2년제 예과를 설치한 것이고, 2년 뒤인 1926년에 본과(3년제 법문학부와 4년제 의학부)를 설치하였다. 총장에는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취임하였다.

황국 신민 서사의 암송이 강요된 것은 193710월부터의 일이다.

 

정답>

'청년 김상옥'이라는 제목 아래 기획 의도로 '김상옥의 주요 활동을 영화로 제작하여 독립운동가의 치열했던 삶과 항일 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본 개요로 '1.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계몽 운동에 힘쓰다''2. 김원봉이 조직한 ()의 일원이 되다'가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3.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다''일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나와 있다. (의열단원) 김상옥(1890~1923)19231월에 벌인 일로, 이를 통해 자료 속 '()'는 의열단임을 알 수 있다.

의열단은 단재 신채호(1880~1936)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1923.1).

오답 해설>

비밀 행정 조직으로 연통제를 실시한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1919.7).

고종의 밀지를 받아 결성된 비밀 단체는 (대한)독립 의군부이다(1912.9).

도쿄에서 일어난 이봉창 의거를 계획한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의 한인 애국단이다(1932.1).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무장 투쟁을 준비한 단체는 서간도(남만주)의 경학사(이후 부민단)이다(1919.5).

 

정답>

'이것은 학생의 날 기념우표이다. 학생의 날은 1929년 한일 학생 간 충돌을 계기로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된 이 운동을 기리기 위해 1953년에 제정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표는 이 운동의 기념탑과 당시 학생들의 울분을 함께 형상화하여 도안되었다. 학생의 날은 2006년부터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운동'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임을 알 수 있다(1929.11.3).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중앙 본부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다.

 

오답 해설>

조선 형평사를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은 형평 운동이다(1923.4).

순종의 인산일을 기회로 삼아 추진된 운동은 6·10 만세 운동이다(1926.6).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준 운동은 3·1 운동이다(1919.3).

국내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 운동은 6·10 만세 운동이다(1926.6).

 

정답>

  주어진 말풍선 속 '()'는 조선어 학회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3111월 조선어 연구회에서 명칭 변경).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 편찬을 시도하였다. 조선어 학회는 1929년부터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시작하였는데 194210월 일제에 의해 조작된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말미암아 편찬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원고는 일제에 압수되었다가, 해방 직후인 19459월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1947년에 조선말 큰사전 2권이 한글 학회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간행되었으며, 3권부터는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1957년까지 총 6권이 간행되었다.

오답 해설>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이 간행된 것은 18988월의 일이다(~1910.8).

최초로 한글에 띄어쓰기가 도입된 것은 영국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가 쓴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이다(1877, 고종 14). 이후 18964월에 간행된 독립신문이 서재필(1864~1951), 주시경(1876~1914),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 등의 노력으로 간행물로는 최초로 한글 띄어쓰기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 1933년 조선어 학회가 만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나오면서 한글 띄어쓰기가 더욱 보편화되었다.

우리말 음운 연구서인 언문지가 [유희(1773~1837)에 의해] 저술된 것은 1824(순조 24)의 일이다.

한글 연구를 목적으로 학부 아래에 설립된 것은 국문 연구소이다(1907.7).

 

정답>

  주어진 자료는 192011월에 계획된 산미 증식 계획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1934).

오답 해설>

화폐 정리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057월의 일이다(~1909.12).

보안회의 경제적 구국 운동이 전개된 것은 19047월의 일이다.

방곡령이 선포된 지역은 황해도(1889, 1890)와 함경도(1889)이다. 방곡령 시행 여부는 18837월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일 통상 장정에서 규정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전국 각 지역에서 강화도 조약 체결 1876년부터 1905년경까지 백여 차례 정도 '방곡령'이 선포되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설립된 것은 190812월의 일이다(19458월 일제 패망까지 지속).

 

정답>

'공의 이름은 인영(寅永)인데 뒤에 철()로 고쳤다. ······ 보호 조약이 체결된 뒤에 동지와 함께 오적(五賊)의 처단을 모의하였는데, 1907년에 계획이 새어 나가 일을 그르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뒤에 ()/를 제창하고 교주를 자임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국민을 진흥하려고 하였다. 일찍이 북간도에 가서 그의 무리와 함께 발전을 도모하였다. ······ 그의 문인(門人)들은 그를 숭상하여 오백 년 이래 다시 없는 대종사로 여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에서 말하는 공의 이름은 (홍암) 나철(1863~1916)이고, ()는 대종교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09).

*출처인 유방집은 조소앙(1887~1957)1933년에 중국 난징에서 펴낸 독립운동가 82인의 평전이다. 책 이름인 유방은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한다'는 뜻인 유방백세(流芳百世)에서 따왔다.

대종교는 중광단을 결성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1911.3). 중광단은 1919년에 이르러 대한 군정회, 대한 군정부로 개편하다가 같은 해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승인을 받아 대한 군정서(북로 군정서)가 되었다.

오답 해설>

사찰령 폐지 운동을 추진한 종교는 불교이다(1911.6).

개벽, 신여성 등의 잡지를 발행한 종교는 천도교이다(1920년 개벽사 설립, 개벽은 19206, 신여성은 19239월에 발행).

배재 학당을 세워 신학문 보급에 기여한 종교는 개신교이다(1885. 8) 배재 학당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1858~1902)에 의해 세워졌다.

박중빈(1891~1943)을 중심으로 새생활 운동(과 간척 사업)을 추진한 종교는 원불교이다(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전반).

 

정답>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활동에 참여하던 시기에 창설된 한인 경위대의 사진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부대는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가 조직하였으며,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인가를 받아 미주 한인들의 대일 전선 동참을 위해 활동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한인 경위대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된 것은 19422월의 일이다(한인국방경위대, 맹호군이라고도 함).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19411210일의 일이다.

일제가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만든 것은 19412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한국 독립군이 쌍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19329월과 11월의 일이다.

중국 군벌과 일제 사이에 미쓰야 협정이 체결된 것은 19256월의 일이다.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고자 국민 대표 회의가 개최된 것은 19231월의 일이다(~6). 74차례의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창조파와 개조파가 극렬히 대립하다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사회주의 세력의 활동 방향을 밝힌 정우회 선언이 발표된 것은 192611월의 일이다.

 

정답>

() '우리는 다음 달에 입국할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환영하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임무를 완수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든지 단독 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9471114, 유엔 총회(2)가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안을 채택한 것에 대해 백범 김구(1876~1949)가 같은 해 1222일에 발표한 성명서이다.

() '올해 1019일 제주도 사건 진압 차 출동하려던 여수 제14연대 소속 3명의 장교 및 40여 명의 하사관들은 각 대대장의 결사적 제지에도 불구하고 남로당 계열 분자 지도하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동월 208시 여수를 점령하는 한편, 좌익 단체 및 학생들을 인민군으로 편성하여 동일 8시 순천을 점령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9481019일에 발생한 '여순 10·19 사건'이 어느 정도 진정된 128일에 열린 국회 제124차 회의에서 기록된 속기록의 내용이다(‘호남사건의 경과에서 설명한 개요와 원인 중 개요에 해당).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 선거인 5·10 총선거가 실시된 것은 1948510일의 일이다.

오답 해설>

1회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것은 194659일의 일이다(1946.3.20~5.9).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가 개최된 것은 19451216일의 일이다(~12.28).

좌우 합작 위원회에서 좌우 합작 7원칙이 발표된 것은 1946107일의 일이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 원칙의 농지 개혁법이 시행된 것은 1950310일의 일이다(제정은 1949621).

 

정답>

'이것은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 이후 10여 일 만에 서울을 수복한 사실을 알리는 전단지입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뒷면에는 맥아더 장군이 서울을 탈환하여 적의 보급선을 끊었으며, 앞으로 힘을 합쳐 공산군을 끝까지 몰아내자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서울 수복 이후에 있었던 사실을 말해 볼까요?'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한 것은 1950928일의 일이다(인천 상륙 작전은 1950915).

.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의해) 흥남 철수 작전이 전개된 것은 19501215일에서 1223일까지의 일이다.

. 소련의 제안으로 정전 회담이 (개성에서 처음) 개최된 것은 1951710일의 일이다. 이후 이듬해인 19527월에 개성에서 다시 본회담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 10월 판문점으로 회담 장소를 옮겼으나 전쟁 포로 문제 등으로 인해 9개월 간 회담이 중지되었다.

오답 해설>

. 애치슨 선언이 발표된 것은 19501월의 일이다. 애치슨 선언이란, 1950110일 당시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1893~1971)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을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필리핀 선으로 한다고 언명한 것을 말한다.

. 국군이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방어한 것은 195083일부터 92일까지이다.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한 국군 제1사단(학도병 500여 명도 포함)이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 제2군단(3개 사단 규모)의 공세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이 전투에서 제1사단 12연대는 특공대를 편성, 적 전차 4대를 파괴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다부통 전투의 승리로 국군은 대구를 일정 기간 고수할 수 있었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김대중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못하면 박정희 후보가 영구 집권하는 총통 시대가 온다고 말했다네'라는 말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장충단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자신을 한 번 더 뽑아달라는 정치 연설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더군'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선거'1971427일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엇보다도 3선 개헌을 통해 출마한 박정희 후보와 당내 경선을 통해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세대교체 바람을 몰고 온 김대중 후보의 대결로 국민의 관심이 모아졌는데, 선거 결과 6342,828(득표율 53.2)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5395,900(득표율 45.2)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국회 해산과 헌법의 일부 효력 정지를 담은 유신이 선포된 것은 19721017일의 일이다(10월 유신).

오답 해설>

정부 형태가 내각 책임제로 바뀐 것은 제3차 개헌 때의 일이다(1960.6).

평화 통일을 주장한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1898~1959)이 처형된 것은 19597월의 일이다.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안이 통과된 것은 19699월의 일이다(1969.9.14). 구체적으로 밝히면 914일 일요일 새벽 2시 국회 본회의장에서 점거 농성을 하고 있던 야당(신민회) 의원들을 피하여 국회 제3별관에서 여당계 의원 122명이 모여 기명 투표 방식으로 투표하여 찬성 122, 반대 0표로 (3)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켰다. 그 후 개헌안은 1017일 국민 투표에서 총유권자의 77.1% 참여에 65.1% 찬성을 얻어 확정되었으며, 1021일에 공포 및 시행되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6·3 시위가 전개된 것은 1964년의 일이다(1964.6.3).

 

정답>

'껍데기 정부와 계엄 당국을 규탄한다'는 제목 아래 '껍데기 과도 정부와 계엄 당국은 민주의 피맺힌 소리를 들으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모든 시민과 학생들은 처음부터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투쟁을 전개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계엄 당국이 진지하고도 순수한 데모 대열에 무차별한 사격을 가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부상자 및 연행자는 추계가 불가능한 실정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계엄 당국과 정부는 광주 시민과 전 국민의 민주 염원을 묵살함은 물론 민주 투사들을 난동자·폭도로 몰아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19805월에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임을 알 수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시위 과정에서 (계엄군에 대항하는) 시민군이 자발적으로 조직된 점을 들 수 있다.

오답 해설>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내세웠던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다.

야당 총재(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으로 촉발된 민주화 운동은 197910월의 부마 민주 항쟁이다.

경무대로 향하던 시위대가 경찰의 총격을 받은 것은 19604월의 4·19 혁명이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