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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알기쉽게 정리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54회 심화 문제와 해설 정리 (2)

 

정답> 

'비변사에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삼남에서 특산물로 종이를 바치는 공인이 청원하기를, 승려들의 숫자가 줄어 종이의 양이 부족한 데도 각 지방의 군영과 관아에서 먼저 가져갑니다. 이로 인해 중앙에 공물로 납부할 종이가 부족해 공인이 처벌되는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송상들이 각 사찰에 출입하여 종이를 몰래 사들여 책문*에 가서 시장을 만드는 행위를 엄금해 은밀히 국경을 넘는 폐단을 없애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공인' '송상'이라는 말을 통해 주어진 자료는 조선 후기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책문(柵門): 조선 후기 청()과의 밀무역을 행하던 지명이다(책문 후시). 만주의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중강 후시(中江後市)가 혁파될 무렵인 현종 원년(1660)부터 청과 조선의 사신들이 내왕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요동의 차호(車戶)와 의주·개성의 상인들 사이에 통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솔빈부는 발해의 지방 행정 구역 중 하나이다(남북국 시대). 특산물인 말이 유명하였다.

오답 해설>

 중인이 시사(詩社)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보부상이 여러 장시를 돌며 물품을 판매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전기수가 저잣거리*에서 한글 소설을 읽어 준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저잣거리: 가게가 죽 늘어서 있는 거리(시장 거리)

 농민이 채소, 담배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정답>

'()로 만나는 실학자'라는 제목 아래 '육지의 재화는 연경과 통하지 않고/바다의 상인은 왜의 물건을 실어 오지 않네/비유컨대 들판의 우물물과 같아/긷지 않으면 저절로 말라 버리네'라는 시가 제시되어 있다. 해설로 '이 시는 연행사의 일원으로 다녀온 그가 청의 발달된 문물을 경험하고 지은 것이다.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된 그는 시의 내용처럼 재화를 우물물에 비유하여 소비 촉진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를 주장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는 초정 박제가(1750~1805)임을 알 수 있다.

박제가는 자신의 저서 북학의에서 수레와 배의 이용을 권장하였다(1778, 정조 2).

오답 해설>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설계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설계한 것은 정조 13년인 1789년의 일이다.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데 사용하였고, 특히 1794년부터 쌓기 시작한 수원성에 거중기가 동원되었다(~1796).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 학파를 형성한 인물은 하곡 정제두(1649~1736)이다.

열하일기에서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한 인물은 연암 박지원(1737~1805)이다. 박지원은 정조 4년인 1780년에 청 건륭제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을 수행하여 청 황제의 피서지인 열하까지 여행하고 돌아온 일이 있는데 이때의 일들을 소상하게 담은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일종의 여행기인 '연행일기').

우서에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을 주장한 인물은 농암 유수원(1694~1755)이다(1729~1737 집필 추정).

 

정답>

'이번 경매 물건은 (고산자) 김정호(1804~1866)가 당시 조선의 지도 제작 기술을 집대성하여 만든 ()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0리마다 눈금을 표시하여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고, 개개의 산보다 산줄기를 표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군현별로 다른 색이 칠해진 채색본으로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는 대동여지도임을 알 수 있다(1861, 철종 12).

대동여지도는 총 22첩의 목판본으로 제작되었다(분첩절첩 방식으로 제작).

오답 해설>

최초의 100리 척이 적용된 지도는 정상기(1678~1752)의 동국지도이다(1740년대).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현존 최고(最古)의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1402. 태종 2).

각 지방의 연혁, 산천, 풍속 등이 자세히 나타나 있는 것은 청담 이중환(1690~1752)의 택리지이다(1751, 영조 27). 택리지는 인문지리서이다. 참고로 유사한 성격의 지리서로 동국여지승람도 들 수 있다. 성종 때 노사신, 양성지 등이 팔도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처음 완성하였으며(1481, 성종 12), 이후 증보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다시 편찬되었다(1530, 중종 25).

전국의 지도 정보에 주요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병기한 지도는 김수홍(1602~1681)의 조선팔도고금총람도이다(1673, 현종 14).

정답>

왼쪽 말풍선에 '진주의 난민들이 경상우병사 백낙신을 협박하고 사람을 참혹하게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합니다'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난민들이 이렇게 극도에 이른 경우는 없었는데, 평소에 잘 위무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박규수를 경상도 안핵사로 내려보내 사태를 수습토록 하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사건'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2월에 발생한 진주 농민 봉기임을 알 수 있다.

경상도 안핵사로 파견된 환재 박규수(1807~1876)의 건의로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다.

오답 해설>

청의 군대에 의해 진압된 사건으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들 수 있다(1882/1884).

서북인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은 홍경래의 난이다(1811, 순조 11).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전개된 사건은 동학 농민 운동의 제2차 봉기 시이다(1894.9).

(1889년과 1890년에) 함경도와 황해도에 방곡령이 선포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일본으로의 과도한 미곡 수출[반출] 때문이었다. 방곡령 선포 항목은 조일 통상 장정에서 규정되었다(1883.7).

정답>

위의 자료에 '왕이 말하였다. 요즘에 서원마다 사무를 자손들이 주관하고 붕당을 각기 주장하니, 이로 인한 폐해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의 분부대로 서원을 철폐하고 신주를 땅에 묻어 버리는 등의 절차를 거행하도록 전국에 알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서원 철폐와 관련된 사안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자료에는 '()에게 군국사무를 처리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그는 궐내에서 거처하며 5군영의 군사 제도를 복구하고 군량을 지급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리고 난병(亂兵)들을 물러가게 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임오군란('난병'이라는 단어가 키워드)의 발발로 재집권하게 된 흥선 대원군(1820~1898)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써 위의 자료 속 ()는 흥선 대원군이고, 흥선 대원군이 시행한 서원 철폐과 관련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1864(고종 원년), 참고로 서원 철폐는 영조 대도 행해짐].

흥선 대원군은 신미양요 직후 종로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1871, 고종 8).

오답 해설>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한 인물은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재위 1776-1800)이다(1793, 정조 17).

나선 정벌을 위해 조총 부대를 파견한 인물은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재위 1649-1659)이다[1654(변급)/1658(신류) 두 차례].

속대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한 인물은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재위 1724-1776)이다(1746, 영조 22).

영은문이 있던 자리 부근에 독립문을 건립한 것은 독립 협회(서재필 주도)이다(1897.11).

정답>

'이것은 어재연(1823~1871)이 이끈 조선군 수비대가 로저스 제독의 함대에 맞서 광성보에서 격렬히 항전한 사건을 보도한 당시의 미국 신문 기사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신미양요 때의 광성진[광성보] 전투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1871.5).

 

제시된 연표에서는 () 시기에 해당한다.

정답>

()'수신사 김기수가 나와 엎드리니 왕이 말하였다. 전선, 화륜과 농기계에 관하여 들은 것은 없는가? 저 나라에서 이 세 가지 일을 제일 급하게 힘쓰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하던가?'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김기수가, 과연 그러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기수가 제1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복명[보고]한 일과 관련된 사실임을 알 수 있다(1876.4~6). ()에는 '어윤중이 동래부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왕에게서 받은 봉해진 서신을 열어보니, 일본 조정의 논의와 정국의 형세, 풍속·인물·교빙·통상 등의 대략을 염탐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너는 일본으로 건너가 크고 작은 일들을 보고 듣되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낱낱이 탐지하여 별도의 문서로 조용히 보고하라라는 내용이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어윤중이 동래부 암행어사로 임명되어'라는 부분에서 주어진 자료는 (사실상의 제3차 수신사인) 조사 시찰단 파견과 관련된 사실임을 알 수 있다(1881.4~7). 박정양, 어윤중, 조준영, 조병직, 민종묵, 심상학, 홍영식 등은 총 5인으로 1((을 구성하여, 각 반별로 조사 대상을 정하여 최종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통리기무아문과 12사가 설치된 것은 고종 17년인 188012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미국에 보빙사가 파견된 것은 고종 20년인 18837월의 일이다(~1884.5).

운요호가 강화도와 영종도를 무단 침입한 것은 고종 12년인 18759월의 일이다.

교원 양성을 위해 한성 사범 학교가 설립된 것은 고종 32년인 18954월의 일이다.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천주교 포교가 허용된 것은 고종 23년인 18865월의 일이다(조불 수호 통상 조약).

정답>

왼쪽 그림에 '오늘 화약을 체결했으니 전주성에서 물러가시오'라는 말과 '알겠소. 폐정 개혁과 농민군의 신변 보장을 해주시오'라는 대답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그림에는 '어제 군국기무처에서 과거제를 폐지했다고 하네'라는 말과 '앞으로 인재 등용에 큰 변화가 있겠군'이라는 대답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왼쪽 그림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체결된 전주 화약과 관련된 사실이고(1894.5.8), 오른쪽 그림은 제1차 갑오개혁과 관련된 사실임을 알 수 있다(1894.7~1894.12).

(자주적인 내정 개혁을 위해) 교정청이 설치된 것은 1894611일의 일이다. 같은 해 625일에 군국기무처가 설치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오답 해설>

(독립 협회에 의해)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은 18964월의 일이다.

한성 전기 회사가 설립된 것은 18981월의 일이다.

(청과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것은 18954월의 일이다.

건양이라는 연호가 제정된 것은 을미개혁 때의 일이다(1895.8~1896.2).

정답>

'지난 시간에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추진한 개혁을 배웠습니다. 이 화면에는 여러분이 수업 후 기억에 남는 용어를 입력한 결과가 나타나 있습니다. 입력 빈도가 높을수록 큰 글씨로 표시됩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구본신참', '원수부', 대한천일은행', '상공학교', '전제군주제', 탑골공원', '양무호', '내장원'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개혁'은 광무개혁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897~1904). 참고로 '내장원'은 조선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이고, '양무호'는 일본에서 도입한 최초의 기선식(汽船式) 근대 군함이다. 19034월에 고종 황제로부터 양무호로 명명되었고, 같은 해 4월에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양전 사업을 시행하여 지계를 발급한 것은 광무개혁 때의 일이다(1899~1904).

오답 해설>

5군영에서 2(무위영·장어영)으로 군제가 개편된 것은 고종 18년인 188111월의 일이다.

박문국이 설치되어 한성순보가 발행된 것은 고종 20년인 188310월의 일이다.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반포한 것은 고종 32년인 18951월의 일이다.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인 육영 공원이 성립된 것은 고종 23년인 18869월의 일이다.

정답>

'신흥 무관 학교 설립 110주년 기념식'이라는 제목 아래 '잠시 후 신흥 무관 학교 설립 110주년 기념식이 온라인으로 거행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신흥 무관 학교는 안창호 등이 1907년 조직한 비밀결사인 ()/가 세운 독립군 양성 기관으로 무장 투쟁 지도자를 다수 배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 속 '()'는 신민회임을 알 수 있다(1907.4).

신민회는 대성 학교(평양)와 오산 학교(평북 정주)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1908.9/1907.12).

오답 해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한 단체는 조선어 학회이다(1933.10). 참고로 조선어 학회는 또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두고 1935년부터 표준어를 사정하여 이듬해인 193610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하였다.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한 단체는 의열단이다(1923.1).

농촌 계몽을 위한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동아일보이다(1931~1934).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립 공채를 발행한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1919.11).

정답>

'신문으로 보는 경제 구국 운동'이라는 제목 아래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을 갚기 위해 전개된 () 당시 15전부터 10원까지 성금을 보낸 50여 명의 명단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에는 대구에서부터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 보상 운동이 들어가야 함을 알 수 있다.

국채 보상 운동은 김광제(1866~1920), 서상돈(1850~1913) 등의 발의로 (대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1907.2~1908.7).

오답 해설>

(허가제) 회사령 폐지에 영향을 받은 민족 운동은 물산 장려 운동이다(1920.8).

색동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민족 운동은 소년 운동이다(1923.5).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준비한 민족 운동은 6·10 만세 운동이다(1926.6).

중국, 프랑스 등의 노동 단체로부터 격려 전문을 받은 민족 운동은 원산 총파업이다(1929.1~4).

정답>

2조로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국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보호·감리의 조처를 함에 있어 이를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조약은 러시아가 일제의 한국에서의 독점적 우위권을 인정한 포츠머스 조약임을 알 수 있다(1905.9.5).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가 파견된 것은 19074월의 일이다(회의가 개최된 것은 6).

오답 해설>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한 것은 18854월의 일이다(~1897.2).

상권 수호를 위해 황국 중앙 총상회가 조직된 것은 18987월의 일이다.

유생 출신 의암 유인석(1842~1915)이 이끄는 의병이 충주성을 점령한 것은 18962월의 일이다(1896.2.17).

일본 군함이 관세 문제로 두모포에서 무력 시위를 벌인 것은 187812월의 일이다[부산 두모포 (해관) 수세 사건]. 관세 자주권과 관련된 사건으로 일본군 수병들이 동래부사를 압박하면서 일본인 상인들에게서 수세를 거두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이 그림은 ()/가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쓴 노동야학독본에 실린 삽화'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처음으로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고 서유견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구당 유길준(1856~1914)임을 알 수 있다(서유견문은 1895년에 간행, 노동야학독본은 1908년 편찬).

유길준은 18856월에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한 바 있다.

오답 해설>

갑신정변 실패 직후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등 9명이다(급진 개화파). 유길준은 갑신정변 당시 미국에서 국비유학생으로 대학 진학을 위해 덤머 아카데미(Dummer Academy)에 다니고 있었다.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 협회를 창립한 인물은 서재필(1864~1951)이다(1896.7).

(근대식 중등 교육 기관인) 배재 학당을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보급한 인물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1858~1902)이다(1885.8).

참정 대신 자격으로 관민 공동회에서 연설한 인물은 죽천 박정양(1841~1905)이다(1898.10).

정답>

'민대총회(民大總會) 개최, 460여 명의 대표 참석'이라는 제목 아래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발기 총회(민대총회)가 오후 1시부터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열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총회에서는 사업 계획을 확정하고 이제 우리 조선인도 생존을 위해서는 대학의 설립을 빼고는 다른 길이 없도다. 만천하 동포에게 민립 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노니, 자매형제는 모두 와서 성원하라라는 요지의 발기 취지서를 발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233월에 열린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발기[창립] 총회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192211월에 결성).

(조선) 민립 대학을 설립하고자 월남 이상재(1850~1927), 강석 한규설(1848~1930) 등이 모금 활동을 주도하였다.

오답 해설>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준 민족 운동은 3·1 운동이다(1919).

사립 학교령이 공포된 것은 19088(대한 제국 칙령 제62, 같은 해 101일부터 시행). 한국인 주도의 사립학교 설립과 운영을 규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일종의 애국 계몽 운동 억압).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실패한 민족 운동은 국채 보상 운동이다(1907.2~1908.7).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여권통문이 발표된 것은 18989월의 일이다(1898.9.1). 최초의 여성 권리 선언문인 여권통문은 서울 북촌 양반 여성들이 주축이 되고 300여 명의 여성들이 찬동해 이루어졌다(찬양회).

정답>

 밑줄 그은 '이 지역'은 연해주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권업회를 창립하여 (기관지이자) 항일 신문(인 권업신문)을 발행한 지역은 연해주이다(1911.12/1912.4).

오답 해설>

숭무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지역은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메리다 지역이다(1910.11). 지역회 한인 회장 이근영(?~?)의 주도로 수십 명의 한인 청년을 모아 사관(士官)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한 지역은 간도[북간도 용정]이다(1906.8).

임병찬이 주도하여 독립 의군부를 조직한 지역은 전라남도이다(1912.9). 1914년에 본거지를 서울로 옮기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는 한편, 명칭을 대한 독립 의군부로 고쳤다.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서를 작성한 지역은 일본 도쿄이다(1919.2). '재일본 동경 조선 청년 독립단 대표 11'의 명의로 제시되었다.

정답>

'선비 정신으로 나라를 지킨 독립운동가'라는 제목 아래 왕산 허위(1855~1908)와 심산 김창숙(1879~1962)이 제시되어 있다. 이어 허위는 '단발령 반대 의병에 참여', '평리원 재판장 역임',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김창숙의 경우는 '을사늑약 체결 반대 상소', '파리 장서 운동* 주도',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가 이력으로 제시되어 있다.

*파리 장서 운동: 3·1 운동 직후 137명의 유림 대표가 한국 독립 청원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낸 일종의 독립 청원 운동이다. 심산 김창숙이 짚신으로 엮어서 상하이 임시 정부로 가져갔고, 임시 정부에서는 다시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한문 원본과 같이 3천부씩이나 인쇄하여 파리 강화 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유림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 13도 창의군을 이끌고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한 인물은 왕산 허위이다(1908.1). 당시 허위는 군사장이었다.

.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의거를 지원한 인물은 심산 김창숙이다(1926.12). 김창숙은 김구에게서 추천받은 나석주(1892~1926)를 중국 천진에서 만나 폭탄과 권총 등의 무기를 전해주면서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을 깨워줄 것을 당부하였다.

오답 해설>

. 관군에게 체포되어 쓰시마섬에서 순국한 인물은 면암 최익현(1833~1906)이다(1907.11).

. 일본의 침략 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를 저술한 인물은 백암 박은식(1859~1925)이다(1915.6).

`

정답>

()'총독은 문무관 어느 쪽이라도 임용될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며, 헌병에 의한 경찰 제도를 고쳐 보통 경찰관에 의한 경찰 제도로 대신할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또한 복제를 개정하여 일반 관리와 교원의 제복과 대검(帶劍)을 폐지하고, 조선인의 임용과 대우 등도 고려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3·1 운동 결과 새로운 총독(3)으로 부임한 해군대장 출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밝힌 '시정 방침 훈시'이다(그중 조선 총독부 관제 개정의 취지)(1919.9).

()의 제1조에는 '경찰서장 또는 그 직무를 취급하는 자는 그 관할 구역 안의 다음 각호의 범죄를 즉결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제2조에는 '즉결은 정식 재판을 하지 않으며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증빙을 취조한 후 즉시 언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한일 병탄 직후인 191012, 제령 제10호로 제정된 '범죄즉결례'임을 알 수 있다.

()의 제1조에는 '치안 유지법의 죄를 범한 자에 대해 형의 집행 유예 언도가 있었을 경우 또는 소추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공소를 제기하지 않은 경우에는 보호 관찰 심사회의 결의에 따라 보호 관찰에 부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형의 집행을 마치거나 또는 가출옥을 허락받았을 경우도 역시 같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193612월에 제정된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조선 총독부 제령 제16)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을 공포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된다. `

정답>

'이 자료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침체에 빠지자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와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개최된 회의의 의사일정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국내외 각지에서 온 대표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처리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 등으로 나뉘어져 격론을 벌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회의'19231월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 대표 회의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국민 대표 회의는 동년 6월까지 74차례의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창조파와 개조파가 극렬히 대립하다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연표에서는 1919년과 1925년 사이인 '()'에 해당한다.

정답>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병로(1887~1964)가 나와 있다. 훈격(건국훈장 독립장)과 서훈 연도(1963)에 이어서 공적 개요가 제시되어 있다. 1906년에 최익현 의병 부대에 참여, 1923년에 김상옥 의거 관련자 변호, 1929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진상 조사 위원, 1930년에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역임),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역임), 1947년 남조선 과도 정부 사법부장 (역임)이 차례로 열거되어 있다.

가인 김병로는 194885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취임하였다(~1957). 이 밖에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법조협회 회장을 맡아 사법부의 발전을 위하여 애썼다.

오답 해설>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 협상에 참석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백범 김구(1876~1949)와 우사 김규식(1881~1950)을 들 수 있다.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인물은 우남 이승만(1875~1965)이다(1946.6).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한 건국 강령을 작성한 인물은 소앙 조용은, 즉 조소앙(1887~1958)이다(1941.11).

일제 패망과 광복에 대비하여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한 인물은 몽양 여운형(1886~1947)이다(1944.8).

 

정답>

'()의 총사령 양세봉, 참모장 김학규 등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중국 의용군 부대와 합세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일본군과 만주군이 신빈현성의 고지대를 거점으로 삼아 먼저 공격했으나 아군이 응전하여 이를 탈취하였다. 아군은 승세를 몰아 적들을 추격한 끝에 당일 오후 3시경 영릉가성을 점령하였다. 5일간의 격렬한 전투에서 한중 연합군은 신빈현 일대 여러 곳을 점령하는 등 커다란 수확을 거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조선 혁명당 산하의 부대인 조선 혁명군임을 알 수 있다. 제시된 상황은 영릉가 전투이다(1933.3~7).

조선 혁명군은 19336월 흥경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오답 해설>

자유시 참변 이후 세력이 약화된 단체는 대한 독립 군단이다(1921.6).

중국 팔로군에 편제되어 항일 전선에 참여한 단체는 조선 의용군이다(1942.7, 1943년 이후부터 군정학교 학생과 교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팔로군에 배속).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한 단체는 한국 광복군이다(1940.9).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독립당의 산하 부대는 한국 독립군이다(1930~1933).

정답>

'송탄유(松炭油)* 자재 공출 명령서'가 제시되어 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으로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시기에 송탄유와 목탄의 할당량 공출을 명령한 문서'라는 설명도 나와 있다. 태평양 전쟁(1941.12.7~1945.9.2)이란 말을 통해 밑줄 그은 '시기'는 일제 강점기 말임을 알 수 있다.

*송탄유: 솔가지를 잘라서 불에 구워 받은 기름

조선 태형령이 관보에 게재되어 시행된 것은 19124월의 일이다(~1920.3).

오답 해설>

(소학교가) 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뀐 것은 19413월의 일이다(3차 조선 교육령 일부 개정).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19444월의 일이다.

19397월에 제정된 일제의 국민 징용령이 조선에도 적용된 것은 193910월의 일이다.

황국 신민 서사가 만들어져 암송이 강요된 것은 193710월의 일이다.

정답>

()'첫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번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4·19 혁명의 발생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한 담화문임을 알 수 있다(1960.4.26).

()에는 '1. 반공을 국시의 제일 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961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주역들이 발표한 '혁명 공약'임을 알 수 있다.

의원 내각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이 이루어진 것은 19606월의 일이다(3차 개헌).

오답 해설>

조봉암(1898~1959)을 중심으로 진보당이 창당된 것은 195611월의 일이다(1956.11.10).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줄여서 '국보위')가 설치된 것은 19805월의 일이다(1980.5.31).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규정한 농지 개혁법이 제정된 것은 19496월의 일이다(1949.6.21).

(재야인사들에 의해) 긴급 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3·1 민주 구국 선언이 발표된 것은 19763월의 일이다.

정답>

'오늘 옛 조선 총독부 건물의 철거가 시작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통령은 50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옛 조선 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역사적 작업이 시작이라고 밝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옛 조선 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58월의 일이다. 광복 50주년인 1995815'첨탑' 철거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9961113일에 해체를 완료(마지막 발파)하였다.

우리나라가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612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칠레와 자유 무역 협정(FTA)를 체결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44월의 일이다.

양성평등의 실현을 위해 호주제가 폐지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81월의 일이다.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710월의 일이다(9차 개헌).

굴욕적인 대일 외교에 반대하는 6·3 시위가 일어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4년의 일이다.

정답>

'사진으로 보는 () 정부'라는 제목 아래 '질병 관리 본부 출범', '아시아·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정상 회의 주최', '행정 중심 복합 도시 건설 시작'이 관련 사진과 함께 제시되어 있다. 기존의 국립보건원이 질병 관리 본부로 확대, 개편되어 출범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2003.2~2008.2)20041월이며, (17) 아시아·태평양 경제 협력체( APEC) 정상 회의가 개최된 것도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511월의 일이다(부산, 2005.11.18~11.19). 또 충남 연기군에서 '행정 중심 복합 도시 (세종 특별자치시) 기공식이 열린 것은 20077월의 일이다(2007.7.20). 참고로 '행정 중심 복합 도시 추진'은 원래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였던 '신행정수도 건설'200410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으로 중단됨에 따라 '행정 중심 복합 도시 건설'로 변경된 것이다[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해 대통령 소속기관으로 발족(2003.4)되었던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로 명칭이 변경(2005.4)].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200512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전국 민주 노동조합 총연맹(줄여서 '민주노총')이 창립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511월의 일이다.

국제 통화 기금(IMF)의 채무를 조기 상환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18월의 일이다(2001.8.23).

경제 정의 실천 시민 연합(줄여서 '경실련') 창립 대회가 개최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19897월의 일이다(1989.7.8).

중학교 입시 제도를 폐지하고 무시험 추첨제를 실시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92월이다(19687월 발표). 우선 서울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었고, 1970년에 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전주에서, 1971년에 가서야 전국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정답>

'역대 정부의 통일 노력'이라는 제목 아래 맨왼쪽 말풍선에는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7·7 선언을 발표하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7·7 선언이 발표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887월의 일이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처음으로 열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고향 방문]가 열린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59월의 일이다(1985.9.21-22). 마지막으로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남북 교류 협력을 위한 개성 공단 조성에 합의하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8월의 일이다. 이때 한국의 현대아산()과 북한 사이에 공업지구 건설이 합의되었고, 20028월에 개성 공단 착공 추진이 최종 합의되었다. 참고로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36월에 개성 공단 착공식이 거행되었다.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