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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방통대, 방송대 농학과 교양 한국사의이해 요점 정리 3. 통일신라와 발해

한국사의 이해

by riho❤️ 2022. 5. 20.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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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통일신라와 발해

 

<통일신라와 발해>(2문제)

나당동맹백제멸망고구려멸망나당동맹결렬삼국통일후백제후고구려고려건국

:금강하구기벌포 매소성(육지)전투

신라:계백황산벌 기벌포(바다)

1. 통일신라

-95소경, 집사부 중심(중앙행정), 외사정파견(감찰), 촌락문서(3년에 한번/세금을 잘 거두려는 목적), 관음신앙, 미륵신앙, 점찰법회, 불교대중화, 역역, 군역, 농민에게 정전지급,

귀족은 풍족한 생활(금임택), 풍수지리설

신문왕: 국학설치, 관료전 지급, 95소경 5서당 10(중앙과 지방 통치조직 정비),

유학(정치이념) 강조

원성왕: 독서삼품과 (관리등용 제한적)

불교사상: 의상-화엄사상, 혜초: 왕오천축국전, 원효: 일심사상, 정토신앙

신라의 동요와 멸망

-김헌창과 장보고의 반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이 봉기: 원종과 애노의 난

-지방 호족 등장

지방에서 군사를 모아 자위력을 갖추고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 부르는 사람들

중앙에서 밀려난 귀족이 지방에 내려가 거주

토착세력인 촌주

지방관이나 지방의 보충지에 군대의 지휘관

-선종의 수용과 사상계의 변화:경전: 교종 (경전과 교리 이해 중시), 선종 (정신수양강조)

-후삼국 분열

삼국통일: 한계점, 우리민족 형성의 기틀 다짐, 민족문화 발전의 토대

2. 발해

-고구려 유민+말갈인(다문화)

-36, (친화), 일본(경제교류), 신라(대립, 우의)

-해동성국, 거란에 멸망

-발해문화: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무덤(당문화 영향)

-유득공의 발해고

 


 

1 신라의 삼국통합과 발해의 건국

 

1) 신라와 당의 연합 <교재 pp. 59>

 

7세기 중반 동북아시아의 판도: 동서연합(신라-)남북연합(-백제-고구려-돌궐)의 대립

백제의 신라 공격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를 계속 공격하여 신라 서쪽 40여 개 성을 빼앗음.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을 쳐서 신라-당나라 간 연결로를 끊어버림.

신라와 당의 연합

신라는 대야성(합천)이 백제에 의해 함락하자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죽령 이북 한강

유역을 반환하라는 고구려의 요구를 거절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군사를 파견하고, 신라는 당에게 패강(대동강)이북의

땅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신라와 당은 동맹을 맺는다.

당의 의도는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복속시키려는 것이었다.

 

2) 백제의 멸망과 유민의 항전 <교재 pp. 60>

 

의자왕의 실정

640년 즉위. 왕권 강화, 민심 수습,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 획득

반대세력 탄압, 아들들에게 좌평의 벼슬과 식읍 하사, 귀족들의 내분, 백성들의 생활궁핍.

 

백제의 멸망

660.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에게 패배. 백강을 통해 당군은 사비성을 함락.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키고 직접 통치하려 함.

 

유민의 항전

주류성(충남 한산)에서 661년 복신과 승려 도침이 왕자 부여풍을 맞아 부흥군을 조직

임존성(충남 예산)에서 흑치상지가 부흥군을 이끌고 저항

백제 부흥군의 항전은 내분 등으로 인해 끝이 났으나 3년간 지속되었다.

 

3) 고구려의 멸망 <교재 pp. 61~62>

 

신라의 당의 협공 : 신라는 남쪽에서 당은 북서쪽과 바다 양면으로 고구려를 협공

고구려의 내분 : 연개소문 사망 후 그의 아들들 권력 다툼,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했다.

평양성 함락 : 연남생을 앞세운 당의 50만 대군은 평양성을 함락한 후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4) 고구려 유민의 항전과 나당전쟁 <교재 pp. 62~64>

 

고구려 유민의 항전

보장왕의 아들 안승과 검모잠은 각기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신라로 들어왔다.

검모잠은 안승을 한성에서 왕으로 세우고 신라에 제후국이 되기를 청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재건을 적극 지원 → ∵ 검모잠과 같은 고구려 세력이 당의 침략을 막아주니까

안승과 검모잠이 다투다 검모잠이 살해당하면서 고구려 항전군이 약화되자,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전북 익산)으로 옮겨 보덕국왕으로 봉하였다.

 

나당전쟁

신라는 당나라가 백제에 웅진도독부, 고구려에 안동도호부를 심지어는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통치하려는 음모를 알아채고, 고구려의 항전을 도우면서 당과 전쟁을 벌였다.

672: 신라와 고구려 항전군은 백수성에서 당-말갈 연합군을 격퇴

674: 당 고종은 김인문을 왕으로 삼는 등 신라의 내분을 획책하고 신라 침략

675: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을 무찌르고, 대동강~원산 이남 영토를 확보

 

5) 발행의 건국 <교재 pp. 64~65>

 

696년 거란족이 독립을 선포한 틈을 타 고구려 유민들은 만주 동북으로 이주하여 말갈족을 규합하며 세력을 늘렸다.

698년 대조영은 만주 동모산 기슭에 진국(震國, 振國)을 세움. 713발해(渤海)로 바꾸었다.

발해의 주민구성 : 고구려인(소수, 지배계층)+말갈족(다수, 피지배계층)

발해의 역사적 의의 : 고구려 후손이 옛 고구려 땅에 나라를 세워 그 문화를 계승·발전시켰다.

 

 

2 통일신라의 지배체제와 사회

 

1) 통치체제의 정비 <교재 pp. 66~67>

 

왕권강화

왕명 변경 : 통일 전의 불교식 왕명에서 유교식 왕명으로 바꾸고 유교정치이념을 내세웠다.

 

유교를 공식적인 국가통치이념으로 천명한 조선뿐 아니라 그 이전의 고려나 통일신라도 왕권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활용하였다.

왕위 계승 고정 : 이후 무열왕계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왕명을 집행하는 집사부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중앙 통치 기구

집사부

왕의 직속기관이며 국정 운영의 중심, 그 장은 시중(중시).

국왕의 명령을 직접 받아 행정을 집행,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

집사부 예하 기관

 

이 름 직 무 이 름 직 무
병 부 군 사 이방부 사법 및 형벌
위화부 관리의 인사 예작부 토목공사
창 부 조세 및 재정 공장부 관청수공업 관리
예 부 교육, 외교, 의전    

 

지방 통치 조직

9: 지방에 9주를 설치(주의 장관은 도독), (도독)-(태수)-(현령) 체제로 정비

·부곡 : 지역이 좁고 인구가 적어 현이 될 수 없는 지역에 설치

5소경 : 지방특별행정구역. 중앙 귀족 일부와 고구려, 백제 귀족들을 거주하게 함.

서라벌이 국토 동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지방세력의 성장을 견제하는 역할.

군사 조직 : 9서당과 10

9서당 : 중앙군. 신라, 백제, 고구려, 말갈, 보덕국인으로 구성. 복색을 달리함.

10: 지방군. 각 주에 1개씩 배치하고, 한산주에만 2개를 배치

 

2) 통일신라의 경제와 백성의 생활 <교재 pp. 68~70>

 

토지지급제도

통일이후 지배층의 권력 기반으로 토지소유의 중요성이 커졌다.

식읍(食邑) : 문무왕이 전공을 세운 귀족에게 새로 얻은 땅과 백성을 나누어준 것.

녹읍(祿邑) : 귀족들에게 등급별로 지급.

관료전 : 신문왕 7(687) 문무관료에게 차등을 두어 지급.

녹봉 : 녹읍을 폐지하고 대체한 것. 관리가 직접 조세를 거두는데서 발생하는 폐단 방지 목적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로 경덕왕 16(757) 녹읍이 부활되었다.

정전(丁田) 지급 : 성덕왕 21(722) 농민들에게도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였다.

불교사원도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지배층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백성의 생활

귀족 :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림. 금입택과 사절유택 소유

백성 : 수확량의 절반을 귀족에게 바치고 공물·부역·군역도 부담해야 했다.

·부곡민 : 포로나 반역죄인들을 격리한 지역. ·목축·수공업에 종사. 백성보다 무거운 부담

노비 : 귀족들의 농장·목장 등에서 사역, 때로는 귀족의 사병으로 전투에도 참여함

 

신라장적

촌을 단위로 한 민정문서로 3년 단위로 다시 작성

가호 수, 인구, 토지면적, 가축의 수, 과일나무의 수 등을 통계하여 기록. 인구는 남녀 구분하여

연령별 6등급으로 기재

목적 : 국가는 장적을 바탕으로 조세와 각종 부담을 부과하였다.

 

3) 통일신라의 대외관계 <교재 pp. 71~72>

 

대당對唐관계

국교정상화 : 성덕왕(713)때 신라왕으로 인정받음. 2년에 1회 정도 당나라에 조공

 신라-당의 교역

 

대일對日관계

문무왕 8(668)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공동대처할 것을 모색

일본이 율령국가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도움

8세기 중엽에는 공식 외교관계보다 일본과의 사적 교역이 활발해짐

신라-일본의 교역

신라의 중계무역 : 당에 있는 신라인들이 당과 일본을 중계. 당나라에 신라방 형성.

장보고의 청해진

장보고는 9세기 서남해안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교역을 주도하였음

신라에서 청해진대사의 직함을 받고 재당 신라인사회까지도 조직·통솔함

4) 신라 말 사회 동요 <교재 pp. 72~74>

 

중앙의 반란 : 진골귀족들의 권력다툼 이긴 자가 왕위를 차지함

혜공왕 4(768) 각간 대공의 반란 이래 숱한 반란이 일어나 혜공왕 사후 155년간 20여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780년 선덕왕 즉위 이후 무열왕 직계자손의 왕위 계승은 무너졌고 왕위쟁탈을 둘러싼 귀족간의 내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지방의 반란 : 822년 김헌창의 반란, 846년 장보고의 반란

개혁 시도 : 원성왕(독서삼품과 설치), 애장왕과 흥덕왕(법령 개정, 인사제도 개혁 등)의 개혁은

귀족들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5) 신라 말의 호족과 농민 <교재 pp. 74~76>

 

지방 호족

호족 구성은 낙향한 진골, 6두품, 지방관리, 촌주, 초적과 도적을 이끌던 세력 등 다양

중앙 진골귀족들의 권력다툼, 지방 통치 이완을 틈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사병 양성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 칭하고, 농민봉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해나감.

 

농민 봉기

원인 : 왕의 실정과 재해, 막중한 조세 부담을 거부하며 봉기하게 됨.

주요 봉기 : 원종과 애노(사벌주), 기훤(죽주), 양길(북원), 붉은바지부대(백제지역)

농민봉기가 전국을 휩쓸면서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했다.

 

후삼국

궁예는 기훤, 양길의 휘하에 있다가 독자세력 형성, 송악 호족 왕건의 항복을 받음

스스로 칭왕하고(901), 국호를 후고구려-마진(904)-태봉으로 바꾸면서 신라를 공격

견훤은 서남지역을 차지하고 무진주·완산주를 중심으로 후백제 건국(900)

후백제와 태봉은 신라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을 이용하여 후삼국의 패권을 쥐기 위한 전쟁을 벌임

 

 

3 발해의 발전과 사회

 

1) 해동성국 발해 <교재 pp. 76~79>

 

발해의 외교

대당관계 : 711년 당은 건국축하 사신을 보내 발해를 회유. 733년 정식 수교 동북아 평화유지

대신라관계 : 발해-신라는 초기에 적대적이었으나, 발해-당 관계가 개선되면서 사신 왕래

대일관계 : 727년 일본과 수교. 790년 신라와 일본의 외교관계 중단 후 발해는 당과 일본의 중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발해의 발전

2대 무왕 : 독자적 연호 사용, 국가체제 정비, 흑수말갈 등 여러 부족 정복

3대 문왕 : 수도 천도(동모산상경)

9대 선왕 : 흑수말갈 등 말갈세력 복속. 요동지역 지배 고구려의 故土 대부분을 회복

사방 5000리의 대제국을 이루며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발해의 통치기구

36부제

3(정당성, 중대성, 선조성)6(·····)

기능 : 중대성(왕명초안), 선조성(왕명선포), 정당성(왕명집행), 6(인사·재정·교육·군사·사법 등)

특징 : 정당성 밑에 중대성·선조성을 두고, 정당성이 6부를 관장하며 행정을 총괄하는 독특한 구조

51562 : (, 주요 중심지), (, 큰 지방행정구역)밑에 주-현을 두어 행정구역 정비

군사조직 : 중앙군은 10로 편성, 지방군은 농사지으며 비상시 대비, 국경에는 독립부대 배치

 

발해의 도로망 : 영주로(중원), 조공도(바닷길), 신라도, 일본도, 거란로 사신·상인들이 왕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 발해는 727년 일본과 수교하면서 보낸 국서에 고려고려국왕이라는 칭호를 써서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표방하였다.

 

2) 발해의 사회와 문화 <교재 pp. 79~81>

 

발해의 주민구성

고구려계(지배층) + 말갈계(피지배층) = 공동체 의식이 약하였음

지배층 : 문무 9품의 등급, 복색 구분, ····남의 작위 수여

피지배층 : 백성과 천민, 말갈족과 타 종족, 고구려 피지배층 후손. 농업과 목축, 군역에 종사

 

발해의 문화

혼성문화. 고구려, , 말갈의 토착문화가 복합됨

발해의 고분 발해의 복합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3대 문왕의 딸 정혜공주의 무덤 : 돌방무덤(석실분)으로 고구려 전통

3대 문왕의 딸 정효공주의 무덤 : 벽돌무덤(전축분)으로 당나라 영향

 

3) 발해의 멸망 <교재 pp. 81~82>

 

내외적 요인

내적 요인 : 9세기 중반 지배층 내분발생, 말갈족은 발해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독자적 행동

외적 요인 : 당의 쇠퇴를 틈타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916년 황제를 선포하고 발해를 공격

발해의 멸망

지배층 분열과 피지배층인 말갈족이 이탈하면서 거란 침입 20일 만에 발해는 순식간에 멸망

세자 대광현은 수천 명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

 

 

4 통일신라의 유교정치이념과 불교

 

1) 유교정치이념 <교재 pp. 82~83>

 

통일신라는 왕권강화와 제도정비하며 유교이념을 내세웠다.

설총의화왕계花王戒: 왕에게 유교이념에 따른 정치를 하도록 권유하는 우화

충담의안민가安民歌: 군신을 부모에, 백성을 자식에 비유하여 각자의 역할을 노래한 것

유학자들의 활동 : 강수(외교문서), 설총(이두 제작), 김대문(계림잡전,화랑세기)

국학 설립

신문왕 2(682) 박사, 조교를 두어논어,효경등과 한문학 강의

15~30세까지의 6두품 출신들이 입학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 양성

독서삼품과 : 원성왕 때 설치한 관리임용시험제도

 

6두품의 좌절

골품제 하에서 국학과 독서삼품과를 거친 6두품은 제 아무리 뛰어나도 정해진 한계 이상으로

출세할 수 없었다. 고위관직은 오로지 진골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사회적 제약에 불만을 품은 6두품들의 당나라 유학이 증가하였다. 이들은 당나라에서 외국인

대상의 빈공과에 합격하여 당의 관리가 되기도 했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최치원이다.

 

2) 불교학과 불교문화의 융성 <교재 pp. 84~85>

 

원효의 정토신앙

·소승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그 뜻을 새롭게 해석하여 많은 저술 남김. )대승기신론소

정토신앙 :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누구나 극락왕생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

 

화엄종과 법상종

화엄사상 : 모든 사물은 현상적으로 차별이 있으나 본질은 다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상.

유식사상 : 법상종. 현상의 모든 차별과 변화는 인간의 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

대표적인 인물 : 의상과 태현

 

유학승 : 통일기 무렵부터 많은 학승들이 당에 유학. 혜초(왕오천축국전-서역 여행기)

 

통일신라의 불교예술

많은 절과 탑, 불상 등 조성: 불국사, 석불사, 다보탑과 석가탑, 성덕대왕신종 등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1966년 석가탑 수리할 때 발견. 현전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

 

선종禪宗의 도입

교학 연구 중심의 교종과 달리 선종은 참선수행을 통해 스스로의 불성을 깨닫는 것을 중시

왕실귀족의 후원을 받던 교종과 달리 지방호족들과 백성들에게 호응을 받아 널리 퍼짐

선종은 개인의 수행에 대해 스승의 인가를 받음. 스승-제자의 계보를 중시(스승의 부도탑과 탑비를 건립하고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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